김원, ‘38선’, 1953, 캔버스에 유채
강 교수는 통일전쟁이라는 용어가 “전쟁 주체의 전쟁 목표를 기준으로 한 전쟁 성격의 규정에 따른 것”이라며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주장한 반면, 재판부는 강 교수의 저작들에 대해 “냉철하고 합리적인 학문적 화두가 아니라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친북 주장”이라며 엄격한 판결을 내렸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인 강 교수 사건은 누구의 입장이 옳고 그른가를 떠나서 전쟁과 분단이 한반도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갈등과 후유증을 낳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화가 이중섭의 ‘빨간색’ 에피소드는 그 후유증의 초기 증상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무언가에 쫓기듯 초조해하던 이중섭이 더는 못 참겠던지 1950년대 어느 날 불쑥 대구경찰서를 찾아갔다고 한다. 거기서 경찰관들을 붙잡고 그가 하소연하듯 내뱉은 말은 이랬다.
“내가 빨간색을 많이 쓰긴 합니다. 그러나 난 절대로 빨갱이가 아닙니다.”
전쟁 참화 겪고도 분단 현실 때문에 전쟁 주제 외면
누가 물어본 적도 없고, 경찰이 수사하거나 취조한 것도 아닌데 그는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가서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극구 해명했다. 그림에 빨간색을 쓴다는 것 자체가 당시 정신병적 위기를 겪고 있던 이중섭에게는 공산주의자로 박해받을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됐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 대한 과잉반응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표현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분단 현실은 이처럼 빈번히 지뢰밭을 걷는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점은 엄청난 전쟁의 참화를 겪었음에도 우리 현대미술사에 전쟁을 주제로 한 인상적인 그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포트리에의 ‘인질(포로)’ 연작 같은 유럽의 전쟁을 주제로 한 기념비적 그림들을 보노라면 더욱 아쉬운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들어 민중미술이 나오기 전까지 전쟁을 주제로 하거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그림 자체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시각을 담은 것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 이 땅에서 제작된 전쟁을 주제로 한 그림은 일단 그 희소성으로 인해 나름의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김원의 ‘38선’은 외부의 힘에 의해 임의로 그어진 지도상의 선 하나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아픈 시련을 가져다주었는지를 강렬한 명암대조법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야트막하게 올라가는 언덕 오른쪽으로부터 여명이 비쳐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늘과 땅 전체의 어둠이 가실 수는 없다. 그 어둠으로부터 솟아나 저 먼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절규는 연옥의 침묵 속에 묻혀버리고 고통스러운 몸짓만이 처절히 부각돼 아픔으로 다가온다. 마치 모든 것이 불에 타 재만 남은 듯한 풍경이지만, 그래도 화가는 빛을 받으며 꿈틀대는 몸뚱이들을 통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쾌대, ‘군상 IV’, 1948, 캔버스에 유채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그려진 이쾌대의 ‘군상 IV’는 동족상잔이 야기할 민족적 비극을 선구자적 혜안으로 예언함으로써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화의 자리에 오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적인 해석이 돋보인다.
폭발하는 화산을 배경으로 어디론가 떠나가는 벌거벗은 사람들. 쓰러진 여인을 부둥켜안은 이가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돌로 내리치거나 물어뜯는 이들도 있다. 이쾌대의 군상은 한반도가 맞닥뜨릴 단군 이래 최대의 참변을 그렇게 생생히 내다보았다. 대구 10월 항쟁과 제주도 4·3사건(1948), 여수·순천 10·19사건(1948) 외에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수백 차례 이상 벌어진 38선 사이의 교전은 이쾌대로 하여금 민족의 앞날에 대한 우려를 가장 중요한 예술적 주제로 삼게 했다.
그가 얼마나 민감하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였는가는, 도상봉의 작품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백자 그림만 잔뜩 걸린 도상봉의 전시를 보고 와서 “그림은 참 잘 그렸지만, 이런 시절에 어떻게 도자기만 저렇게 그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다는 이쾌대. 그에게 예술은 삶과 현실의 고뇌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다.
이쾌대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그 역시 자신의 그림이 예언한 엄청난 고난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시대를 관통했다. 이쾌대는 전쟁 중 남하한 인민군에 합류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포로 송환 과정에서는 북쪽을 택했는데, 그로 인해 남한에 남은 가족과 영영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절절한 가족애로 볼 때 그의 북쪽행은 지금껏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래도 추론해보자면, 이쾌대의 친형 이여성이 몽양 여운형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다 몽양 피살 직후 월북했는데, 그의 가족이 안고 있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짐이 그가 반공포로로 남아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내내 괴롭히리라 우려했던 것 같다. 어쨌든 북에서도 그는 불우한 삶을 산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만큼 냉전 시대의 고통을 한 몸에 지고 간 예술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시작돼 1953년 6·25전쟁으로 절정에 이른 이른바 냉전체제. 이 체제가 동유럽 사회주의와 옛 소련의 몰락으로 해체됐다고는 하지만, 한반도 상공에는 그 한기가 아직 남아 있다. 북한 혹은 통일 관련 이슈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크고 작은 갈등을 야기한다. 그 냉전체제의 마지막 명줄을 끊어야 할 사명이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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