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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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처음과 끝을 지킨 문중

정권 찬탈 소식 듣고 미련 없이 낙향 … 敎授亭 은거 25년간 후학 양성에 매진

  • 허시명/ 여행작가 www.walkingmap.net

    입력2005-10-10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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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처음과 끝을 지킨 문중

    조승숙이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교수정.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을 배출한 땅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말이다. 경북 안동은 퇴계와 그 후학들로 대표되는 성리학자가 많다. 그렇다면 경남 함양에는 누가 있는가? 대표적 인물로 정여창이 있다.

    유학의 보급에 크게 기여했던 역대 거봉들을 모아 동국 18현이라고 부른다. 동국 18현에는 신라 사람 설총과 최치원, 고려 사람 안향과 정몽주가 포함되는데, 조선 사람으로는 일두 정여창(1450~1504)을 가장 먼저 꼽는다. 그러나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이 먼저 거론되는 까닭은 그가 정여창보다 앞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갔고, 한훤당의 학통이 조광조로 이어지며 더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정여창 고택에서 1km 떨어진 곳

    정여창이 이렇듯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훗날 그의 스승이 된 김종직이 함양군수(1473~76년 재임)로 있었던 인연도 있고, 그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충신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의 이웃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자 학자가 살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려의 처음과 끝을 지킨 문중

    조선 성종이 조승숙을 기려 내린 글을 후손들이 비석에 새겨놓았다.

    정여창의 고향인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은 한옥이 즐비한 동네로,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고택을 지키며 살고 있다. 이 개평마을에서 1km쯤 떨어진 냇가에는 교수정(敎授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덕곡(德谷) 조승숙(1357~1417)이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정여창의 할아버지는 조승숙과 안면이 있었을 터이고, “우리 동네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충신이 살았단다”는 말을 손자에게 해줬을 것이다. 훗날 조승숙의 증손자인 조효동이 중앙에서 벼슬을 할 때, 정여창을 효자로 추천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집안이 서로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수정은 냇가의 두둑한 언덕 위에, 허리가 휜 노송에 둘러싸여 있다. 교수정 출입문 앞에는 ‘敎授臺(교수대)’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교수대 바위 위에는 일부러 판 듯한 홈이 있는데, 안내를 해준 조승숙의 20세손 조래봉(72) 씨는 “움푹 파인 홈은 별자리이고, 저 밑의 냇물은 은하수이지요”라고 했다. 냇가의 바위를 크게 다듬지도 않고, 홈 몇 개를 북두칠성 형태로 파놓고 냇물과 어울리게 하여 우주를 만들어놓았다니, 옛 사람의 풍류가 참으로 운치 있게 여겨진다. 교수대 아래에는 인의예지충신효제를 이르는 ‘八德門(팔덕문)’이 새겨진 바위가 있고, 그 아래 바위에는 ‘德谷趙先生遺墟碑(덕곡조선생유허비)’라는 글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조승숙의 후학이나 후손들이 이곳을 대단히 소중한 공간으로 기려왔음을 알 수 있다. 정자 많기로 소문난 함양 땅이지만, 교수정 교수대의 언덕만큼 정겨운 공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나무와 글 새겨진 바위가 잘 어울린다.

    고려의 처음과 끝을 지킨 문중

    고려 태조의 친필.

    교수대 옆에는 조승숙을 기리는, 거북머리를 귀엽게 조각한 자연석 위에 높이 320cm의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조선 성종이, 총애하던 함양 출신 문장가 유호인에게 글 짓게 하여 내린 사제문(賜祭文)인 ‘首陽明月栗里淸風(수양명월율리청풍)’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수양은 백이숙제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숨어든 산이고, 율리는 도연명이 은거했던 선양(瀋陽)의 마을 이름이다. 성종은 조승숙을 수양산의 밝은 달과 율리의 맑은 바람에 비유한 셈이다. 이 비석은 1882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조승숙은 함안 조씨로, 시조인 조정(趙鼎)의 11세손이다. 조정은 중국에서 귀화했는데, 왕건을 도와 고창성(지금 안동)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개국벽상공신에 올랐다. 그의 선조는 고려를 세우는 데 이바지했고, 그는 고려를 향한 충절을 마지막까지 지켜냈으니, 함안 조씨 문중에 고려의 처음과 끝이 담긴 셈이다.

    고려의 처음과 끝을 지킨 문중

    정여창 고택에 새겨진 큰 글씨. 충효절의의 글씨 속에 정여창 조승숙이 겹쳐 보인다.

    조승숙은 부여감무(5~6품에 해당하는 지방관, 조선시대에 현감으로 바뀜)로 있다가 이성계가 정권을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 땅 함양으로 물러나버렸다. 그의 나이 36세 때 일이다. 비록 그는 퇴임할 무렵에 한미한 지방관이었지만, 임금에게서 주목받는 능력 있는 관리였다. 조승숙은 20세(1376년)때 사마시에 합격했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했다. 저작랑(著作郞·나랏일과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담당)이 되어 조정에서 일했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나라 황제를 탄복시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그가 부여감무를 자청해 외관직으로 나갈 때는 임금이 침향궤(침향나무로 만든 팔받침대)를 하사했는데, 그 궤에 “강호에 있을지라도 나라를 잊지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부름을 받지 않고, 고향 마을 덕실에서 가까운 교수정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조승숙은 25년의 세월을 보냈다. 함양에 훗날 유학이 크게 일어난 것도 두문동 72현으로 불린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경학을 가르치던 소소당(昭昭堂) 터에, 1398년(조선 태조7년) 함양향교를 건립할 때도 명륜당 문기를 작성한 이가 조승숙이다. 모름지기 ‘우함양’의 맨 앞에 조승숙이 있다 하겠다.

    조승숙이 선산에 은거한 길재에게 보낸 시에서 삶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산을 등지고 물에 다다라 속세 떠나 살아가네/ 저녁에 달 뜨고 아침에 안개 끼니 흥이 남아 있구려/ 서울에 사는 벗이 내 소식을 묻거들랑/ 대숲 깊숙한 곳에 누워 글 읽는다 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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