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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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車, 러시아 공략 ‘급가속’

기아차, 이제프스크 조립공장 본격 가동 … 쌍용차도 내년부터 현지서 조립생산

  •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5-10-05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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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車, 러시아 공략 ‘급가속’

    이제프스크 기아 조립공장에서 만들어진 스펙트라 승용차.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100km 떨어진 인구 65만명의 소도시 이제프스크(Izhevsk). 우랄산맥 서쪽에 위치한 우드므르트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이곳은 ‘죽음을 파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생산하는 이즈마슈(이제프스크 기계제작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서방에서 AK47 혹은 아카보로 불리는 이 소총은 1947년 미하일 칼라슈니코프 하사에 의해 개발된 뒤 지금까지 1억 정이 넘게 팔린 무기시장의 ‘베스트셀러’다. 뛰어난 성능에 비해 값이 싸고 잔고장이 없어 주로 저개발국가의 민병대나 게릴라들이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세계 곳곳의 내전과 크고 작은 분쟁의 현장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다.



    이제프스크 시민들은 칼라슈니코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근교 도시인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소총의 고향’만이 아니라 대예술가가 탄생한 곳이라는 사실도 알아달라는 뜻이다.

    이런 이제프스크가 유라시아 시장 공략에 나선 한국 자동차의 교두보가 될 전망이다. 8월 기아자동차 현지 조립공장이 문을 열어 9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기 때문. 이 공장에서 나오는 첫 모델은 스펙트라 승용차로, 올해에 8000대를 시험생산하고 내년에는 2만5000대, 2008년까지 연 4만대 생산 체계를 갖출 예정이다.

    ‘무기의 도시’로 알려졌지만 이제프스크에는 군수뿐 아니라 민수 산업도 있다. 이즈마슈의 관계사인 자동차공장 이즈아브토에서는 옛 소련 시절부터 국민차인 ‘지굴리’ 승용차와 밴 등을 생산해왔다. 이즈아브토는 연간 30만대의 양산 체계를 갖춘 러시아 2위의 자동차 생산업체. 바로 이 이즈아브토가 기아차의 생산기지가 된 것이다.



    8월22일 열린 공장 가동식엔 한국 측에서는 김재섭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와 기아차 박정문 전무가, 러시아 측에서는 알렉산드르 볼코프 우드므르트 자치공화국 대통령과 안드레이 레우스 연방산업에너지부 차관이 참석했다.

    대지만 16만 평인 이즈아브토 공장은 허름한 겉모습만으론 내부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전형적인 소련 스타일의 산업시설이다. 하지만 안에 들어서자 깔끔하게 정돈된 현대식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6개월 동안 50여명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현장에 머물며 생산설비를 새로 설치했기 때문. 여기에만 1억 달러(약 1036억원)가 들었다. 설비는 90% 이상이 한국산. 도장(塗裝) 작업의 마무리는 로봇이 사람을 대신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장 곳곳에서 여성 노동자가 눈에 많이 띄었다. 남녀 차별 없이 일했던 사회주의의 전통은 여전했다.

    한국車, 러시아 공략 ‘급가속’
    가동식에 참석한 볼코프 대통령은 “일자리가 줄어들까 봐 걱정이 컸는데 기아차가 들어와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그러고 보니 스펙트라 생산라인 옆의 러시아제 승용차 생산라인이 멈춰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러시아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높아졌지만 러시아 자동차 업계는 오히려 고전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가격은 싸지만 품질이나 디자인이 크게 떨어지는 러시아산 차를 외면하고 외제차를 선택하기 때문. 2002년 7%에 못 미치던 수입차 판매 비중은 지난해 20%로 늘어났다.

    소련 시절 군수산업과 중공업에 치중하다 보니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핵무기를 만들면서도 정작 승용차 도색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산업구조의 불균형 탓이다. 75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이즈아브토도 몇 년 전부터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문을 닫을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 돌파구로 기아차와 손을 잡은 것.

    미하일 도빈도 이즈아브토 사장은 “(국산차를 생산하는) 기존 라인을 점점 축소해 기아차 생산에 전념하고 싶다”고 밝힐 정도로 기아차와의 합작에 적극적이었다. 시작은 한국에서 수입된 부품을 조립하는 방식이지만 점점 생산 모델도 늘리고 자체 생산 부품 비중도 높여가고 싶다는 것. 이에 대해 기아차의 박 전무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기아차와 이즈아브토의 합작은 서로에게 ‘윈윈’이 된다. 기아차로서도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러시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두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한국차는 러시아 시장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현대차가 수입자동차 시장점유율 1위를, 기아차는 7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러시아에서 팔리는 차 10대 중 1대가 한국차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일본, 독일의 유수한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3억 인구의 거대한 옛 소련연방 시장을 노리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 러시아는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황금시장이다. 유럽이 자동차 보유 대수가 1000명당 400대인 것에 비해, 러시아는 겨우 250대 수준이다. 하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자동차 보유 대수는 1000명당 165대였다. 짧은 기간에 자동차 보유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러시아에서 지난해에만 157만대의 자동차가 팔렸다.

    현대차, 러시아서 수입차 시장점유율 1위

    그렇다고 무작정 러시아 시장에 자동차를 내다 팔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 러시아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완성차 수입을 규제하면서 조립생산이나 기술제휴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완성차의 경우 수입관세가 최고 33%나 되지만 현지 조립생산 차의 경우 관세는 최고 3%로 줄어든다.

    이 때문에 포드, 르노, 폴크스바겐, 도요타 등이 앞다투어 현지 생산기지 확보에 나섰다. 특히 현대차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도요타는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조립공장을 세우고 있다. 6월 열린 착공식에는 이곳이 고향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한국車, 러시아 공략 ‘급가속’

    모스크바 국제모터쇼에 나온 현대 NF쏘나타.

    물론 한국 업체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기아차만 해도 이번의 이제프스크 공장에 앞서 이미 1998년 칼리닌그라드에 합작공장을 세웠다. 현대차는 러시아 남부 타간로크에서 조립생산을 하고 있다. 쌍용차도 남부 울리야노프에 조립공장을 완공해 내년부터 렉스턴을 생산할 계획이다.

    러시아 정부가 외국 자동차 업체들의 진출을 유도하는 것은 파급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종합산업이다. 기아차가 현지 조립공장을 세우면서 KCC 등 협력업체들도 러시아에 동반 진출했다. 핵심 부품만 2000여개에 이르는 자동차 산업의 특성 때문이다.

    8월에 열린 제9회 모스크바 국제모터쇼도 전에 없는 관심을 모았다. 30개국 650여개 자동차 관련 업체가 참가해 러시아 소비자에게 열띤 구애의 손짓을 보냈다. 눈길을 끌기 위한 아이디어도 무척 기발해 어지러울 정도였다. 전시장마다 늘씬한 미녀들이 도우미로 나서 방문객을 맞는 것은 기본이었고, 드러낸 엉덩이에 차바퀴 자국을 찍은 차림으로 전시장 주변을 도는 레이싱걸까지 등장했다. 모스크바 강변의 엑스포센터 주변 교통이 모터쇼 기간 내내 심한 정체를 겪을 정도로 호응이 컸다. 여기서도 한국차들은 주목받았다.

    현대차는 신형 NF쏘나타를 ‘NF’란 이름으로 공개했다. 현지에서 조립생산되는 기존의 쏘나타와의 차별화를 위해서였다. 손장원 현대차 동구지역본부장은 “올해는 도요타와의 격차를 확실히 벌리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프라이드와 신형 스포티지를 선보인 기아차의 이형택 동구·CIS 지역본부장도 “올해는 133% 매출 신장을 이루겠다”고 자신했다.

    도빈도 이즈아브토 사장이 “칼라슈니코프 소총에 이어 기아차가 이제프스크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상징적이다. 전자제품에 이어 한국차까지 러시아 시장을 장악할 수 있을까. 러시아 시장을 둘러싼 치열한 자동차 대전의 막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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