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말이 너무 많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말의 내용에 대해서도 시비가 벌어진다. 거기에다 말의 형식, 즉 말투에 대해서도 이른바 ‘품격’을 놓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말이란 응당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대통령의 말투는 ‘부적절’하거나 ‘함량미달’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라는 독일 사회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노대통령의 거친 말투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의 눈엔 노대통령이 ‘문명화’가 덜 된 사람-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가원수가 되기엔 교양이 부족한 사람-쯤으로 비칠 것이다.
‘문명화 과정’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엘리아스의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실증적인 사료분석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구사회의 매너의 진화과정에 대한 추적이다.
가령 오늘날 서양인들은 식사를 할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며 맨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식사 매너다. 그러나 중세에는 포크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근세 초까지 유럽의 상류층 사람들은 손으로 고기를 뜯어 먹고 그릇과 술잔을 함께 사용했다. 또 도시의 뒷골목에서 나체 또는 반나체의 남녀가 공동목욕탕을 향해 뛰어가는 장면도 흔히 목격됐다고 이 책은 쓰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본능적인 삶의 양식이 `‘동물적’` 또는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돼 소멸돼가는 것이 ‘문명화`’였다는 게 엘리아스의 결론이다.
말투의 경우 문명화는 ‘점잖은’ 궁정언어를 닮아가는 과정이었다. 즉 자신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각종 둔사와 수식어를 덧붙이면서 말투는 ‘야만적’에서 ‘문명적’으로 발달해갔다. ‘야만 대 문명’은 ‘하위계층 대 상위계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하위계층의 말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상위계층-중산층은 상류층-의 말을 닮아가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 영화가 있다. 원작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극 ‘피그말리온’.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애정을 느껴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자 조각상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에서 취한 제목이다. 영화에서 히긴스 교수라는 언어학자가 조각가, 꽃을 파는 일라이자라는 아가씨가 조각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사투리를 들으면 누구나 그 사람이 아일랜드 사람인지 요크셔 사람인지 알 수 있지만, 나는 6마일 이내까지 그 지역을 알아낼 수 있어. 런던 같으면 2마일, 혹은 번지까지 추적할 수가 있지.”
이렇게 말할 정도로 뛰어난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하류계층인 일라이자의 발음과 말투를 바꿔놓겠다고 동료와 내기를 한다. 일라이자는 발음도 엉망이고 사투리가 심하며, 빈민층이 즐겨 쓰는 은어를 심하게 사용한다.
A를 ‘아이’로 발음하는 일라이자는 ‘The Rain in Spain in the Plain(스페인 평야에 비가 내린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발음교정에 성공한다. 발음만 바뀐 게 아니라 보잘것없는 하류계층 여인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변신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기분 좋은 해피엔드다. 하지만 버나드 쇼가 그런 미담을 쓸 리는 없다. 쇼는 당시 영국 상류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일라이자는 히긴스를 흠모하게 된다. 그러나 히긴스는 일라이자를 여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론을 확인시켜준 실험대상으로만 대한다.
히긴스에게는 무지와 불분명한 발음, 사투리, 저속한 언어야말로 ‘언어적 계급’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쇼는 부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통해 상류층이 형성된다고 믿는, 히긴스 교수로 대표되는 상류층의 허영심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거친 말투를 고치기 위해 히긴스 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
대통령의 말이란 응당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대통령의 말투는 ‘부적절’하거나 ‘함량미달’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라는 독일 사회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노대통령의 거친 말투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의 눈엔 노대통령이 ‘문명화’가 덜 된 사람-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가원수가 되기엔 교양이 부족한 사람-쯤으로 비칠 것이다.
‘문명화 과정’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엘리아스의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실증적인 사료분석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서구사회의 매너의 진화과정에 대한 추적이다.
가령 오늘날 서양인들은 식사를 할 때 포크와 나이프를 쓰며 맨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의 식사 매너다. 그러나 중세에는 포크 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근세 초까지 유럽의 상류층 사람들은 손으로 고기를 뜯어 먹고 그릇과 술잔을 함께 사용했다. 또 도시의 뒷골목에서 나체 또는 반나체의 남녀가 공동목욕탕을 향해 뛰어가는 장면도 흔히 목격됐다고 이 책은 쓰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본능적인 삶의 양식이 `‘동물적’` 또는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돼 소멸돼가는 것이 ‘문명화`’였다는 게 엘리아스의 결론이다.
말투의 경우 문명화는 ‘점잖은’ 궁정언어를 닮아가는 과정이었다. 즉 자신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각종 둔사와 수식어를 덧붙이면서 말투는 ‘야만적’에서 ‘문명적’으로 발달해갔다. ‘야만 대 문명’은 ‘하위계층 대 상위계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하위계층의 말이 자신보다 위에 있는 상위계층-중산층은 상류층-의 말을 닮아가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 영화가 있다. 원작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극 ‘피그말리온’.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애정을 느껴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자 조각상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에서 취한 제목이다. 영화에서 히긴스 교수라는 언어학자가 조각가, 꽃을 파는 일라이자라는 아가씨가 조각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사투리를 들으면 누구나 그 사람이 아일랜드 사람인지 요크셔 사람인지 알 수 있지만, 나는 6마일 이내까지 그 지역을 알아낼 수 있어. 런던 같으면 2마일, 혹은 번지까지 추적할 수가 있지.”
이렇게 말할 정도로 뛰어난 언어학자인 히긴스는 하류계층인 일라이자의 발음과 말투를 바꿔놓겠다고 동료와 내기를 한다. 일라이자는 발음도 엉망이고 사투리가 심하며, 빈민층이 즐겨 쓰는 은어를 심하게 사용한다.
A를 ‘아이’로 발음하는 일라이자는 ‘The Rain in Spain in the Plain(스페인 평야에 비가 내린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발음교정에 성공한다. 발음만 바뀐 게 아니라 보잘것없는 하류계층 여인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변신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기분 좋은 해피엔드다. 하지만 버나드 쇼가 그런 미담을 쓸 리는 없다. 쇼는 당시 영국 상류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일라이자는 히긴스를 흠모하게 된다. 그러나 히긴스는 일라이자를 여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론을 확인시켜준 실험대상으로만 대한다.
히긴스에게는 무지와 불분명한 발음, 사투리, 저속한 언어야말로 ‘언어적 계급’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쇼는 부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통해 상류층이 형성된다고 믿는, 히긴스 교수로 대표되는 상류층의 허영심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거친 말투를 고치기 위해 히긴스 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