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할멈과 호랑이’의 한 장면. 지게 거적 밤송이 등의 사물들이 할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이 정겹다.
이중 극단 사다리의 ‘팥죽할멈과 호랑이’(4월24일~5월5일·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와 라트 어린이극장의 ‘신기한 수프’(8월 말까지·라트 어린이극장)는 한국 전래동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해석방법은 판이하게 다르다. ‘토종’과 ‘서양’의 대결이랄까.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 어린이극 ‘팥죽할멈과 호랑이’
‘팥죽할멈과 호랑이’는 극작가도 연출가도 없다. 이번이 네 번째 공연인 이 작품은 극단 ‘사다리’의 배우들이 직접 공동으로 창작하고 연출해 만들었다. 그리고 공연을 거듭하며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조금씩 다듬었다. ‘팥죽할멈과 호랑이’의 큰 장점은 이 같은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급조된 흔적이 없고 모든 면에서 자연스럽다는 점.
막이 열리면 우선 극단원들이 막대와 훌라후프 등으로 기차 나비 물고기 애벌레 등을 만드는 ‘무엇이 될까’ 놀이를 한다. 아이들은 극단원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대를 바라보게 된다. 이런 놀이는 극장이라는 낯선 공간에 와 어리둥절한 아이들의 시선을 끌고 ‘이제 연극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일종의 ‘준비운동’이라고. 어린이극 공연 경험이 풍부한 사다리의 관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극은 전래동화의 철저한 재현에 충실하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할머니가 “동짓날 팥죽을 끓여주겠다”며 위기를 모면한다. 동짓날 할머니를 잡아먹으러 온 호랑이를 절구 밤 똥 지게 거적 등이 힘을 합쳐 물리친다는 내용. 이 전래동화는 한 설문조사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등장인물 중 진짜 사람은 할머니 단 한 명뿐이다.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호랑이와 지게 멍석 밤송이 등 동식물과 사물들. 할머니가 이들 사물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장면은 어른에게도 절로 미소를 짓게끔 한다. 또 극 중간에 등장인물들이 계속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마당극 형식의 진행은 아이들에게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극보다도 공연장소인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 있다. 이곳은 원래 극장이 아니라 연회장이다. 때문에 공연 도중에 아이들이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등 문제점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무대 역시 아기자기한 내용의 어린이극을 공연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넓었다. 사다리의 한 단원은 “서울 정도의 도시라면 최소한 서너 곳의 어린이극 전문 공연장이 있어야 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어연극 ‘신기한 수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돌멩이 수프’ 전설에 한국 전래동화를 합쳐 만든 창작극으로 영국 호주 등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라트 어린이극장은 ‘리틀 드래곤’에 이어 3월 말부터는 두 번째 작품인 ‘신기한 수프’를 공연하고 있다. ‘신기한 수프’는 돌멩이로 맛있는 수프를 끓였다는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전설에 혹부리 영감 등 한국의 전래 동화를 합쳐 만든 작품이다. 라트 어린이극장의 연출자 로저 린드와 드라마투르기 캐서린 피스가 공동으로 대본을 썼다. 여섯 명의 배우는 각기 세 명의 호주인과 두 명의 한국인, 그리고 한 명의 영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신기한 수프’는 일단 그 연극적인 장치들로 어린 관객들을 압도한다. 화려한 의상과 소품, 우주공간처럼 환상적인 무대장치, 그리고 무대 뒷면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 등 무대는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마법사 스펠싱어와 심술쟁이 쌍둥이는 갖가지 재료를 솥 안에 쏟아넣으며 신기한 수프를 만들어간다. 마법사가 재료를 솥 안에 넣으면 대형 스크린에 수프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영상으로 보이는 등 어린 관객들을 위한 배려는 곳곳에서 돋보인다.
로저 린드는 “관객들이 영어로 연극이 진행된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유쾌한 극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극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여기에는 캐서린 피스가 작곡한 음악과 음향이 큰 몫을 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신기한 수프’의 가장 큰 장점은 영어 학습용 비디오처럼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대신 아이들이 저절로 극에 몰입할 만큼 연극적 재미가 크다. 그러다 보니 객석의 꼬마 관객들은 ‘Because we are making the strange soup’ 정도의 대사는 저절로 이해하는 듯했다.
그러나 SF적인 무대 구성에 한국의 전래동화들을 끌어들인 것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혹부리영감이나 꿀똥 싸는 강아지, 꼬리로 물고기를 낚는 호랑이 등의 전래동화들은 이야기로만 묘사되어 극의 흐름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다. 일곱 살 난 딸 가원이와 함께 온 관객 이현미씨(37)는 “전작인 ‘리틀 드래곤’에 비해 영어로 설명하는 부분이 많아 아이가 좀 어려워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어린이극은 그 양과 질이 모두 과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고 좋아졌다. 개중에는 극단 유의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 등 수준급 작품도 있다. 극단 사다리의 연출자 겸 배우 김지웅씨는 “지금의 부모 세대만 해도 어릴 때 연극을 보고 자란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때문에 아이와 어린이극을 보러 온 부모들은 이런 연극을 보며 향수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린이극을 보며 아이들은 상상력과 꿈을 얻지만, 어른은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어른을 위한 동화’가 출판계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듯이, 이제 어린이극은 단순히 어린이들만을 위한 연극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보는 ‘가족극’으로 새로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