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4일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문학제’가 열린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 권환, 김기진, 김영랑, 김진섭, 송영, 양주동, 윤극영, 윤기정, 이은상, 최명식 10명의 1903년생 문인들의 문학사적 업적을 기리는 심포지엄에 앞서 소설가 윤기정 선생의 장남 윤화진씨(67)가 단상에 올랐다.
“월북이니 납북이니 하는 말들이 문학사에서 어떻게 비춰지는지 잘 모르지만, 가족들이 받은 영향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열한 살 무렵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난 뒤 소식이 끊겨버린 아버지. 그후 88년 월북작가 해금 때까지 한국 문학사는 그들의 이름을 지워야 했다. 60년 가까이 월북자 가족으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회한으로 윤씨는 끝내 눈시울을 적셨다.
아버지 윤기정 선생은 1920년대 김기진, 송영, 박영희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결성하고 초대 카프 서기장을 역임하는 등 소설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했다. 특히 ‘카프’의 프로문예운동에 비판적인 김화산과 ‘아나키스트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46년 월북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윤씨는 살아 있다면 올해로 100세가 될 아버지에게 ‘축시’를 바쳤다.
우리의 가슴에는 아직도/ 당신께서 간직한 기막힌 울분과/ 입 막힌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살피시어, 우리에게/ 화해의 눈물을 내리소서/ 모질게 몰아치던 양극의 싸움 속/ 나라 위해 백성 위해/ 무얼 할까, 온몸으로/ 고민했던 외로웠던 당신
부친의 기일을 알 수 없어 제사도 지내지 못한 한을 뒤로하고 그는 기념제가 열린 이 축일을 제삿날로 삼겠다고 했다. 이 문학제를 통해 그는 예상치 못한 큰 선물을 받았다. ‘카프 문학운동의 주역들’이란 발제를 맡은 한양대 서경석 교수(국문학)가 96년판 북한인명사전을 통해 윤기정 선생의 기일이 3월1일임을 확인해준 것이다.
윤씨는 “월북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며 아버지의 부재로 가족이 겪은 고통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도 “당시 지식인으로서 아버지가 왜 가족까지 버리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너무나 알고 싶다”고 고백했다.
문학제 이튿날 4명의 누이와 함께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한 윤씨는 “해방 공간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사건과 그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소설로 옮겨 그때의 고통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경제학 박사인 윤씨는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전문위원을 거쳐 95년 귀국 후 한라그룹 고문, 성원건설 사장, 금융개혁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2년 전 자신의 회사를 창업했다.
“월북이니 납북이니 하는 말들이 문학사에서 어떻게 비춰지는지 잘 모르지만, 가족들이 받은 영향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열한 살 무렵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훌쩍 떠난 뒤 소식이 끊겨버린 아버지. 그후 88년 월북작가 해금 때까지 한국 문학사는 그들의 이름을 지워야 했다. 60년 가까이 월북자 가족으로 숨죽이고 살아야 했던 회한으로 윤씨는 끝내 눈시울을 적셨다.
아버지 윤기정 선생은 1920년대 김기진, 송영, 박영희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결성하고 초대 카프 서기장을 역임하는 등 소설가이자 이론가로 활약했다. 특히 ‘카프’의 프로문예운동에 비판적인 김화산과 ‘아나키스트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46년 월북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윤씨는 살아 있다면 올해로 100세가 될 아버지에게 ‘축시’를 바쳤다.
우리의 가슴에는 아직도/ 당신께서 간직한 기막힌 울분과/ 입 막힌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살피시어, 우리에게/ 화해의 눈물을 내리소서/ 모질게 몰아치던 양극의 싸움 속/ 나라 위해 백성 위해/ 무얼 할까, 온몸으로/ 고민했던 외로웠던 당신
부친의 기일을 알 수 없어 제사도 지내지 못한 한을 뒤로하고 그는 기념제가 열린 이 축일을 제삿날로 삼겠다고 했다. 이 문학제를 통해 그는 예상치 못한 큰 선물을 받았다. ‘카프 문학운동의 주역들’이란 발제를 맡은 한양대 서경석 교수(국문학)가 96년판 북한인명사전을 통해 윤기정 선생의 기일이 3월1일임을 확인해준 것이다.
윤씨는 “월북이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며 아버지의 부재로 가족이 겪은 고통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도 “당시 지식인으로서 아버지가 왜 가족까지 버리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너무나 알고 싶다”고 고백했다.
문학제 이튿날 4명의 누이와 함께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한 윤씨는 “해방 공간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사건과 그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소설로 옮겨 그때의 고통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경제학 박사인 윤씨는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전문위원을 거쳐 95년 귀국 후 한라그룹 고문, 성원건설 사장, 금융개혁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2년 전 자신의 회사를 창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