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취임 축하 사절로 청와대를 방문한 콜린 파월 美 국무장관이 노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왼쪽). 미국 워싱턴 기념관에 있는 링컨 동상.
노대통령의 이번 방미는 철저하게 북핵 및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춘 ‘테마 방문’이다. 방미 수행단도 이 원칙에 따라 구성했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청와대의 라종일 국가안보, 반기문 외교, 조윤제 경제 등 보좌관들이 핵심 수행팀. 손길승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경제5단체장과 이건희 삼성, 구본무 LG,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등 경제인도 동행한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일가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류진 풍산 회장은 ‘특별한’ 동행자다. 북핵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필요한 인력만 엄선한 셈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벽’은 여전히 부담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노대통령의 미국 내 인지도는 매우 낮다. 특히 노대통령을 반미주의자로 인식하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나온 “반미면 어떠냐”는 등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미국에 알려졌고, 이로 인해 노대통령은 반미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더구나 4월23일 북·미·중 3자회담에서 북한측 리근 수석대표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해 한반도 안보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노대통령은 이번 방미를 전후해 이를 평화적으로 풀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른 것.
‘반미주의자’ 낙인 부담감 여전
청와대측은 4월초 선발대를 미국으로 보낸 데 이어 반기문 외교보좌관이 4월13일 출국, 사전 정지작업 등을 통해 성공적인 방미를 위한 기반 조성에 나섰다. 이들이 현안 해결을 위해 미대륙을 휘젓고 있다면 30초짜리 방송광고(CF) 출연은 푸근한 서민대통령의 얼굴을 알리려는 의도다. 사물놀이 공연과 붉은악마 응원 장면 등이 배경으로 나온 이 CF는 5월 중순 노대통령 방미를 전후해 미국 CNN을 통해 하루 10회씩 12일 동안 방영될 예정이다.
링컨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도 그 연장선상에서 추진되고 있다. 가난한 통나무집과 ‘진영’ 생가, 독학과 변호사의 길, 잇따른 낙선 등 대통령이 되기까지 겪은 수없는 좌절과 실패, 제16대 대통령이 된 점 등 노대통령과 링컨의 정치역정은 매우 흡사하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2월25일자에 노대통령을 “산골에서 태어난 소년이 가난을 딛고 성장해 대통령이 됐다”며 인내로 역경을 딛고 일어선 링컨 같은 인물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눈치 빠른 미국사람들은 ‘노무현과 링컨’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측은 4월초 링컨기념관 방문과 관련, 미국측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측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확인했다. 청와대측은 “노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링컨이라는 점을 적극 활용, 미국민의 감성을 자극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경제 불안 해소 등을 위한 청와대측의 방미 준비작업은 링컨 이미지 활용 외에도 많다. 노대통령은 4월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 대미외교에 대해 ‘한 수’ 배웠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두 차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바 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은 남북 문제에 대해서도 식견이 뛰어나 북핵 문제 해결과 노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도 직간접적으로 노대통령의 방미 등 4강외교 도우미로 나섰다(상자기사 참조).
청와대측은 이런 조언을 토대로 국군의 이라크 파병 등을 예로 들며 한미동맹 강화 기조에 변함이 없다는 점을 강조할 계획이다. 북핵 문제를 논의할 북·미·중 3자회담을 수용키로 한 결정도 노대통령의 외교적 유연성을 부각할 소재로 거론된다. 노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직후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취임사에서도 ‘평화번영정책’의 4원칙 가운데 하나로 ‘당사자 원칙에 기초한 국제협력’을 제시했을 정도. 그러던 노대통령이 한국을 배제한 3자회담을 전격 수용했다.
주한 미대사관은 최근 노대통령의 이 같은 외교노선 정립을 토대로 ‘노대통령이 달라졌다’는 보고서를 본국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측은 첫 외교무대에 나선 노대통령의 권위와 대외적 위상을 고려한 각종 의전과 일정 등도 추진할 예정이다.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담도 그 가운데 하나. 외교가 한 소식통은 “의전과 일정 조정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 대표단이 노무현-부시의 캠프데이비드 회담을 제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 미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전통적으로 미국은 강대국 정상들에게만 캠프데이비드의 문호를 개방하는 경향이 있다”며 한미 대통령의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부시 정부 들어 부시 미 대통령과 캠프데이비드 회동을 한 인사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정도로 알려졌다.
청와대측은 또 미국의 영빈관 ‘블레어 하우스’를 숙소로 정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측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게 관계자의 전언. 청와대측은 또 방미 기간중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빈방문’이 아닌 ‘실무방문’의 한계로 성사가 어려울 전망이다.
북핵과 경제라는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이번 방미 일정 중 청와대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인텔의 반도체공장 유치건이다. 인텔사는 1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며 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이 현재 ‘피’ 튀기는 유치전쟁을 벌이고 있다. 노대통령은 5월16일 실리콘밸리의 인텔사를 직접 방문, 크레이그 배럿 회장(CEO)과 공장 유치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워싱턴 방미단에 끼지 않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도 샌프란시스코로 부른다. 한 당국자는 “연말까지 최종 투자 결정이 내려질 인텔의 반도체공장을 유치할 수 있다면 한국이 도입한 역대 해외투자 중 최대규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인텔사가 투자를 결정할 경우 한반도 안보 위기로 투자를 꺼리는 제2,제3의 외국 투자자들의 발길을 끌 수 있다”고 의미를 정리했다. 한편 노대통령은 이번 방미를 앞두고 세계외교사, 현대국제정치학, 미국현대외교사 등 외교관련 서적을 꼼꼼히 읽고 있다고 청와대 송경희 대변인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