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4월25일 오전 청와대에서 고영구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보안선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장 부속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이날 민간인 접견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국정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다음 날 보안선서를 하고 각서에 서명한 다음에야 정상근무를 할 수 있었다. 국정원에 입성한 이들은 이원장을 도와 조직 축소와 인원 감축 등 국정원 ‘개혁’ 작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 고영구 원장은 ‘하드 랜딩’을 예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원장 임명을 둘러싸고 여야가 강경 대치하고 있는 데다 시민단체에서 고원장의 국정원 개혁안이 ‘많이 미흡하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 국정원 내부에서도 고원장이 국정원의 ‘기능’을 약화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국정원 기능 약화시키면 곤란”
여기에 고원장과 함께 개혁을 주도할 세력이 바로 진용을 갖추지 못한 점도 고원장의 국정원 ‘안착’을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고원장은 4월25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직후 국정원 개혁 방향과 관련, “탈정치화, 탈권력화를 통한 국정원의 정상화”를 강조했다. 고원장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국내 보안범죄에 관한 수사권을 검찰과 경찰에 이양하고 정치정보를 비롯한 국내정보 수집은 계속하되, 정치 개입 시비를 차단하겠다고 밝힌 것은 탈정치화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으로 보인다.
고원장의 이런 개혁안은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참여연대는 “국내 보안범죄의 수
4월22일 오전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고영구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청문위원들의 잇따른 ‘추궁성 질문’에도 표정을 크게 흩뜨리지는 않았다.
인수위에서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검찰 쪽은 “검찰이 보안범죄에 대한 첩보 수집 능력이나 수사 노하우가 전혀 없어 현재로선 수사권을 이양받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보안범죄에 대한 수사는 국정원이 주도하고 검찰은 국정원에서 이첩된 수사내용을 재확인, 기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정보 수집방법 개선방침과 관련해서는 국정원 개혁 의지까지 의심받고 있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장유식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는 과거 정권에 비해 권력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정권 말기로 갈수록 정보기관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면서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정보수집 범위를 한정하는 등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4월23일 김덕규 국회 정보위원장 한나라당 간사인 정형근 의원, 민주당 간사인 함승희 의원(왼쪽부터)이 고영구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 채택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
정보 전문가들은 또 “국정원 기능을 약화하는 게 국정원 개혁의 전부가 돼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고원장의 개혁방향에는 탈정치화와 탈권력화만 있지, 탈냉전시대에 맞는 국정원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정립하고 여기에 충실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자칫 ‘과거청산’이라는 ‘빈대’에만 집중하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것 아니냐는 우려인 셈이다.
국정원 내부적으로는 인적 청산 방향과 관련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고원장은 “대대적인 인적 청산은 없다”면서 국정원 직원들의 동요를 막고 있지만 김대중 정부 시절 잘나갔다는 평가를 받은 특정지역 인맥들이 특히 긴장하고 있다. 고원장 등 신임 국정원 지휘부가 “이 지역 인맥 청산 방침을 미리 세우고 들어온 것 아니냐”면서 집단적인 반발 ‘조짐’마저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청와대와 민주당 신주류는 민주당 정보위원들조차 고원장에 대한 ‘거부권’ 행사에 손을 들어준 것은 국정원 내 이 지역 인맥의 움직임과 연계돼 있다고 보고 있다. 이들이 민주당 구주류로 분류되는 같은 지역 출신 정보위원들에게 ‘구명(救命) 로비’를 하면서 민주당 정보위원들이 서교수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표출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다.
국정원 내 특정지역 인맥이 고원장의 국정원장 지명 직후 크게 동요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원장이 국정원 업무 보고를 받으면서 국정원 제도 개선 및 조직개편을 위해 구성한 태스크포스팀에 이 지역 출신이 배제되자 더욱 그랬다. “그래도 지난해 대선에서 한나라당 쪽에 줄 서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데, ‘특정지역 배제’가 말이 되느냐”는 반발까지 있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이 지역의 명문 J고 출신들의 움직임.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원내의 J고 인맥이 청와대 내 일부 386 참모에게 접근, ‘J고 출신이 국정원을 말아먹는다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신건 전 원장 시절 J고 출신은 원장직과 1차장, 대공정책실장(1급), 정치단장(2급) 등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이에 대해 한 국정원 관계자는 “솔직히 김대중 정부 시절 인사에서 특정지역 출신이 혜택을 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특히 J고 출신들이 눈에 띈 것은 J고 출신 자원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국회 정보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5급 이상 직원 중 J고와 대구의 한 명문고 출신이 각각 44명으로 가장 많았다.
국정원의 탈정치화를 내건 고원장이 임명과 함께 맞닥뜨린 첫번째 문제가 정국의 급랭이다. 한나라당에서는 ‘해임건의안 검토’ 발언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고원장이 국정원 안팎의 ‘역풍’에 맞서 과연 국정원 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