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 서울캠퍼스 서부별관에서 열린 영문과 3학년 출석수업 모습.
“공부를 즐기는 직장인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석사학위까지 있는 주부들이 타대학 영문과 교수까지 초빙해가면서 아파트에 모여 학구열을 불태우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이를 성인들의 ‘학문적 공동체’라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두언 서울시 정무부시장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올해 방송대 영문과 3학년에 편입한 그는 순식간에 열렬한 방송대 지지자가 돼버렸다. “입으로만 평생교육을 외치다 실제로 대학에 적을 두고 여럿이 함께 공부하니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아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의 목표는 주말에는 반드시 책을 잡아 진도를 놓치지 않는 것과 5월에 열리는 팝송경연대회에서 우승하는 것.
방송대가 생긴 지 이미 30년이 넘었다. 졸업생 수만 30만명이 넘고 이번 학기에 등록한 재학생만도 20만명에 달한다. 전국 각지에 14개 지역대학을 두고 있어 규모로는 서울대를 능가하는 매머드급 대학이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송대는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학위를 주는 ‘B급 대학’으로 인식돼왔다. ‘학력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직장인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면서 성장해온 것.
졸업·재학중인 국회의원만 10여명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방송대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주5일 근무제로 여가가 늘어나면서 지식정보화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평생교육’의 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이에 따라 유명인사들의 입학이 늘고 있고, 일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방송대 열풍이 불고 있을 정도. 명문대 출신의 입학생도 매년 1500명을 넘는다고 한다. 재학생들은 이제 “방송대는 시대의 키워드”라고 자랑한다.
최근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들의 ‘방송대 사랑’. 올해 새로 편입학한 국회의원만 해도 이성헌(경영학), 전용학, 남경필(이상 경제학), 이병석(법학) 의원 등 쟁쟁하다. 이미 졸업했거나 재학중인 의원만 10여명에 달한다. 물론 30만 동문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게 아닌가 하는 곱지 않은 시각도 있지만 이성헌 의원처럼 보좌진과 함께 방송대에 다니며 적극적으로 학업에 매진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언론계와 법조계 등 전문직 종사자들의 입학도 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어학 관련 학과를 선택, 정통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한다. 이에 따라 영문·중문·일문과는 편입 경쟁률만 4대 1을 넘는다.
세칭 명문 K대를 나온 김모씨(31)는 2001년 방송대 법대에 편입학했다. 판에 박힌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자극을 주고 싶었기 때문. 하지만 그가 방송대 모임에서 느낀 점은 기존 대학이나 직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강압적인 술자리 문화나 선배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을 리 없죠. 남녀노소, 직업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스승이고 학생입니다.”
오종남 통계청장(영문3),정두언 서울부시장(영문3),이성헌 의원(경영3),남경필 의원(경제3),심혜진(방송정보1) (위 부터)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간접경험하는 것이 방송대의 또 다른 장점. 더구나 학위에 대한 부담 없이 수업에 참여하기 때문에 학점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다. 방송대 강사를 지낸 김양은 박사는 “학력 위주의 사회에서 한 번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바꿀 기회가 없었던 30대 이상의 기성세대가 방송대를 통해서 독특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풀이한다.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다. 4월23일 서울 혜화동 방송대 본부 인근의 한 지하 카페. 퇴근시간이 되자 영문과 연극동아리 ‘끼’ 회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손에는 셰익스피어 원작 ‘한여름밤의 꿈’ 원문을 들고 있다. 늘 가사일에 쫓기던 주부 진수옥씨(29)도 매주 2회 연극 모임에 참석한다. 신입생인 김씨의 목표는 올 11월에 공연될 연극의 주연배우로 무대에 서는 것. 선배들과 함께 원문을 번역하고 발성연습을 하며 극단을 꾸려나간다. 회비는 한 달에 1만원.
방송대 법학과 강경선 교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평등하게 교육을 받는 것은 민주주의의 확대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매년 두 차례씩 전국을 돌면서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온 강교수는 올해 울산에 갔을 때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고졸 노동자가 벌써 법대 4학년이 되었더군요. 헌법에 기초해서 ‘이라크전쟁 파병 반대론’을 펴는 데 논리가 저보다 뛰어났어요. 뿐만 아니라 50대 의사학생과 30대 주부학생과 함께 토론하고 모임을 꾸려가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의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방송대의 정신은 ‘교육도 복지다’로 요약된다. 방송대 학비는 한 학기 25만원 내외, 대부분 기성회비로, 한 달 평균 5만원꼴이다. 학원비보다 싸다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다 보니 ‘평생교육’이라는 선진국형 교육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데 다소 소홀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사이버대학과 해외 원격대학 등 다른 평생교육 기관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도 방송대로선 부담이다. 방송대 관계자들은 “예산이 거의 없어서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방송대의 꿈은 ‘야무지다’. 재외동포들이나 교도소 재소자들, 나아가 군인과 장애우들, 낙도지역 주민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들의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방송대 경영학과 심재영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방송대처럼 음지에서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다진 기관은 없었다”고 자평한다.
방송인 최유라씨의 시어머니는 70세가 다 돼가지만 아직도 방송대에 다니고 있다. 졸업할 기회도 있었지만 일부러 졸업을 늦추고 있다. 그 이유를 묻자 “이 나이에 스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계속 유급해서라도 방송대에 다니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