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왜 읽는가.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다고 생각하면, 지금이야 굳이 책일 까닭이 없다. 온라인 공간에는 평생 봐도 다 못 읽을 자료와 기록이 즐비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생겨나는 중이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좋은 스승을 좇아 서점, 도서관 등에서 열리는 강좌나 강연에 참석해도 좋고, 원한다면 여러 동영상 강의를 이용할 수도 있다. 내용이 충실하고 수준 높기로 정평 난 강의만 챙겨도 이번 생을 채우고도 남는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의 습득 말고 책을 읽는 더 깊은 이유는 아마도 다른 데 있는 듯하다. 책은 저 홀로 하는 타자와 대화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초대해 내적으로 다시 사는 일이요,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다시 연주하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 습득이 주로 시각피질을 활용하는 한정적 활동인 반면, 읽기는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경험으로 보충하면서 눈으로 떠올리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느끼지 않으면 즐기기 어려운 전뇌적 활동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창의성은 이렇게 힘을 들여야 간신히 강화할 수 있는 느린 생각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아를 실감하고 내면의 변화를 체험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설이란 무엇인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혁신의 행사이고, 시간을 새롭게 함으로써 삶의 기초를 다시 세우려는 마음의 제의다. 가족의 사랑을 더하고 친지를 만나 안부를 주고받는 친분을 다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휴식 속에서 삶의 축을 바루고 독서를 통해 정신의 바탕을 다지는 것 또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길잡이로 삼을 수 있도록 지난해 나온 책 가운데 간직할 것들을 소개하고 싶다.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어크로스)에 따르면 디지털 시대가 반드시 아날로그 문화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디지털 환각’ 또는 ‘인지부조화’는 오래갈 수 없다. 인터넷에서 가상현실을 살아도 우리는 이 지상에서, 이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LP반 판매량이 폭증하고, 몰스킨 노트가 귀환하며, 필름카메라가 유행하고, 독립잡지가 출현하는 등 아날로그 세계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디지털 기술과 함께’ 귀환하는 시대다. 아날로그 문화가 부활하는 현장을 감지해 보여주는 생생한 보고서인 이 책은 디지털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폭풍 같은 통찰력을 불러일으킨다.
안대회, 이종묵, 정민 등이 편역한 ‘한국 산문선’(전 9권 · 민음사)은 신라 원효에서부터 현대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1300년 동안 온축 된 우리 산문의 백미를 뽑은 ‘21세기 동문선’이자, 그 질과 양에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장 강화’라고 부를 만하다. 누구나 글을 써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 모든 곳으로 퍼뜨릴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글쓰기 열풍이 불고 있다. 2010년부터 8년에 걸친 오랜 고투의 산물로, 문장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지적 높이와 정서적 깊이까지 갖춰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을 만한 산문이 가득하다. 항상 곁에 두고 틈나는 대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전 11권 · 위즈덤하우스)는 춘추전국시대 서술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초한지’ ‘열국지’로 압축되는 낡은 의리관의 세계와 흔하게 각인된 중화주의 시각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므로, 이제는 완전히 폐기할 때가 됐다. 이 시리즈는 지난 100년 동안 축적된 현대 중국학의 성과를 풍부하게 반영했을 뿐 아니라 ‘여행하는 인문학자’라는 별칭답게 저자가 직접 겪은 지리적 답사의 생생함을 사진과 서술로써 풍성히 담고 있다.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장안의 지가를 올린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은 이른바 ‘맘충’이라는 쓰라린 호칭을 받은 여성들의 아픔에 대한 르포르타주 소설이다. 이 작품이 건조하고 뜨거운 문장을 택했다면, 어떤 대척점에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문학동네)이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혀로 천천히 굴리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베이는 촉촉하고 서늘한 문장의 미학. ‘바깥’이나 ‘여름’ 같은 “시끄럽고 왕성한” 주목받는 모습이 아니라, 오로지 조사 ‘은’과 같이 구석진 기호를 통해서만 간신히 드러나는 감정선이 애처롭다. 바깥이 여름이기에 내면에서 흩날리는 눈보라가 더욱더 차가운 이들의 이야기. 드러나지 못한 감정에 공감할 줄 아는 작가의 재능이 한결 완숙해졌다.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은 실험에 온전히 헌신하는 과학자의 문장도 충분히 서정적 미려함을 가질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책은 촉망받는 식물학자인 한 여성 과학자의 회고를 치열함 그 자체로 드러낸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누적되는 좌절을 견디는 조울증의 날들, 실험실을 유지하려고 서브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 남성 중심주의에 물든 과학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가혹한 차별이 담겼다. 또한 뿌리와 이파리, 나무와 옹이, 꽃과 열매 등의 소제목으로 이뤄진 식물들이 이 삶을 온전히 껴안음으로써 이 책은 “빛을 향해 자라”고 싶었던 소녀의 꿈이 씨앗으로 뿌려지고 세상이라는 토양과 만나 어떻게 한 그루 나무로 크는지를 표현한 문학이 된다. 한 철학자의 말대로 ‘아름다움’이 ‘다시 보고 싶다’는 뜻이라면, 이 책이야말로 아름다운 책이다.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성찰의 힘이 있는 책이다. 바티칸대법원의 동아시아 최초 변호사인 한동일 교수가 서강대에서 강의한 라틴어 수업의 내용을 묶었다. 실제로는 라틴어 수업이 아니라 데 메아 비타(De mea vita), 즉 ‘내 인생’의 의미를 묻고 궁구하는 ‘인생수업’에 가깝다. 서양문화의 한 원류를 형성한 라틴어에는 서구들이 세월을 가로질러 축적해온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라틴어 공부를 통해 저자는 이들의 통찰을 나눠주면서 인간이 무엇을 위해,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답한다. 꾸준히 반복하는 실천만이 아비투스(habitus), 즉 우리의 습관을 이루고 삶을 바꾼다. 묻고 싶다. 이 기나긴 연휴, 당신은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
하지만 지식과 정보의 습득 말고 책을 읽는 더 깊은 이유는 아마도 다른 데 있는 듯하다. 책은 저 홀로 하는 타자와 대화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초대해 내적으로 다시 사는 일이요,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다시 연주하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 습득이 주로 시각피질을 활용하는 한정적 활동인 반면, 읽기는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경험으로 보충하면서 눈으로 떠올리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느끼지 않으면 즐기기 어려운 전뇌적 활동이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창의성은 이렇게 힘을 들여야 간신히 강화할 수 있는 느린 생각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고 한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아를 실감하고 내면의 변화를 체험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설이란 무엇인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혁신의 행사이고, 시간을 새롭게 함으로써 삶의 기초를 다시 세우려는 마음의 제의다. 가족의 사랑을 더하고 친지를 만나 안부를 주고받는 친분을 다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휴식 속에서 삶의 축을 바루고 독서를 통해 정신의 바탕을 다지는 것 또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길잡이로 삼을 수 있도록 지난해 나온 책 가운데 간직할 것들을 소개하고 싶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은 질병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파괴한다. 질병은 단순히 생물학적 현상이거나 개인 관리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이가 사회적 차별 경험으로 어떻게 병을 얻고 고통당하는지를 과학적으로 분명히 하고,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마음을 통해 치유한다. ‘아픔의 길’이 ‘슬픔의 길’이 아닌 ‘기쁨의 길’이 되려면, 즉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먼저 좋은 사회부터 건설해야 함을 깨닫게 한다. 지난해 최대 화제작이었다.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어크로스)에 따르면 디지털 시대가 반드시 아날로그 문화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디지털 환각’ 또는 ‘인지부조화’는 오래갈 수 없다. 인터넷에서 가상현실을 살아도 우리는 이 지상에서, 이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LP반 판매량이 폭증하고, 몰스킨 노트가 귀환하며, 필름카메라가 유행하고, 독립잡지가 출현하는 등 아날로그 세계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디지털 기술과 함께’ 귀환하는 시대다. 아날로그 문화가 부활하는 현장을 감지해 보여주는 생생한 보고서인 이 책은 디지털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에게 폭풍 같은 통찰력을 불러일으킨다.
안대회, 이종묵, 정민 등이 편역한 ‘한국 산문선’(전 9권 · 민음사)은 신라 원효에서부터 현대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1300년 동안 온축 된 우리 산문의 백미를 뽑은 ‘21세기 동문선’이자, 그 질과 양에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장 강화’라고 부를 만하다. 누구나 글을 써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 모든 곳으로 퍼뜨릴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글쓰기 열풍이 불고 있다. 2010년부터 8년에 걸친 오랜 고투의 산물로, 문장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지적 높이와 정서적 깊이까지 갖춰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을 만한 산문이 가득하다. 항상 곁에 두고 틈나는 대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전 11권 · 위즈덤하우스)는 춘추전국시대 서술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초한지’ ‘열국지’로 압축되는 낡은 의리관의 세계와 흔하게 각인된 중화주의 시각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므로, 이제는 완전히 폐기할 때가 됐다. 이 시리즈는 지난 100년 동안 축적된 현대 중국학의 성과를 풍부하게 반영했을 뿐 아니라 ‘여행하는 인문학자’라는 별칭답게 저자가 직접 겪은 지리적 답사의 생생함을 사진과 서술로써 풍성히 담고 있다.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50만 부 이상 판매되며 장안의 지가를 올린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은 이른바 ‘맘충’이라는 쓰라린 호칭을 받은 여성들의 아픔에 대한 르포르타주 소설이다. 이 작품이 건조하고 뜨거운 문장을 택했다면, 어떤 대척점에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문학동네)이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혀로 천천히 굴리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베이는 촉촉하고 서늘한 문장의 미학. ‘바깥’이나 ‘여름’ 같은 “시끄럽고 왕성한” 주목받는 모습이 아니라, 오로지 조사 ‘은’과 같이 구석진 기호를 통해서만 간신히 드러나는 감정선이 애처롭다. 바깥이 여름이기에 내면에서 흩날리는 눈보라가 더욱더 차가운 이들의 이야기. 드러나지 못한 감정에 공감할 줄 아는 작가의 재능이 한결 완숙해졌다.
호프 자런의 ‘랩 걸’(알마)은 실험에 온전히 헌신하는 과학자의 문장도 충분히 서정적 미려함을 가질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책은 촉망받는 식물학자인 한 여성 과학자의 회고를 치열함 그 자체로 드러낸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누적되는 좌절을 견디는 조울증의 날들, 실험실을 유지하려고 서브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 남성 중심주의에 물든 과학계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가혹한 차별이 담겼다. 또한 뿌리와 이파리, 나무와 옹이, 꽃과 열매 등의 소제목으로 이뤄진 식물들이 이 삶을 온전히 껴안음으로써 이 책은 “빛을 향해 자라”고 싶었던 소녀의 꿈이 씨앗으로 뿌려지고 세상이라는 토양과 만나 어떻게 한 그루 나무로 크는지를 표현한 문학이 된다. 한 철학자의 말대로 ‘아름다움’이 ‘다시 보고 싶다’는 뜻이라면, 이 책이야말로 아름다운 책이다.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성찰의 힘이 있는 책이다. 바티칸대법원의 동아시아 최초 변호사인 한동일 교수가 서강대에서 강의한 라틴어 수업의 내용을 묶었다. 실제로는 라틴어 수업이 아니라 데 메아 비타(De mea vita), 즉 ‘내 인생’의 의미를 묻고 궁구하는 ‘인생수업’에 가깝다. 서양문화의 한 원류를 형성한 라틴어에는 서구들이 세월을 가로질러 축적해온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라틴어 공부를 통해 저자는 이들의 통찰을 나눠주면서 인간이 무엇을 위해,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답한다. 꾸준히 반복하는 실천만이 아비투스(habitus), 즉 우리의 습관을 이루고 삶을 바꾼다. 묻고 싶다. 이 기나긴 연휴, 당신은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