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에서 일하는 여주인공 조시(샬리즈 시어런 분)는 갱도에서 동료 광부로부터 강간을 당한다. 사장과 노조 측에 성폭력을 고발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자 동료들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견뎌야지 저항하면 쫓겨난다”고 충고한다. ‘평소 행실이 좋지 못했다’는 억측과 비난에도 끝내 직장 내 성차별 집단소송을 제기한 조시는 그에 자극받은 소수 동료들과 ‘연대’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다.
유지나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영화평론가)는 “영화 ‘노스 컨츄리’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미투운동이 성공하려면 우리 모두가 ‘연대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성폭행 피해자에게는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미투운동이 잠깐 유행처럼 번져서는 안 된다. 이 땅에 성폭행, 성추행, 성차별 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같은 연대는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특권층 내 성범죄는 관습적 병폐의 정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가부장적 문화와 봉건적 위계질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인사상 불이익 두려워 침묵
규영(마이크 앞에 선 이) 서울시의회 부의장 등 더불어민주당 전국여성지방의원협의회 회원들이 2월 1일 오후 서울시의회에서 서지현 검사를 응원하는 ‘미투 지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권박미숙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는 “사측은 인사와 관련해 막강한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피해자가 인사상 불이익을 주장해도 회사는 인사기록 등을 통한 타당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법원은 대부분 회사 자료를 보고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개정 남녀고용평등법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사측보다 피해자의 주장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판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012~2016년 4년 동안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2항(불이익 조치 관련)을 위반해 고용노동부에서 자체 감사를 한 경우는 26건에 불과하다. 심지어 검찰에 기소된 사건은 2건밖에 되지 않는다. 기소율로 따지면 7.7%. 일반 형사사건 기소율은 47%이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주변의 잘못된 시선 또한 성폭행 사건의 본질을 축소하거나 왜곡한다. 서지현 검사와 관련된 기사 댓글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유통되는 글들을 보더라도 악의적인 내용이 넘쳐난다. ‘8년이나 지난 일을 지금 폭로하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인기 얻으려고 애쓴다’ ‘정치권으로 나가려는 꼼수’라는 식의 매도부터 ‘성형 티가 너무 난다’ ‘가족이 불쌍하다’ 등 인신 공격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외부적 피해는 더 큰 상처로 남아 3차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권박미숙 활동가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 옷차림 등을 운운하며 사건의 원인이 마치 피해자에게 있는 양 몰고 가면 피해자는 결국 ‘내가 잘못했구나’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몹쓸 짓을 당했구나’ 하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너도 좋았던 거 아니냐’ ‘무슨 꿍꿍이가 있어 문제 삼는 것 아니냐’ 식의 왜곡된 시선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투운동 보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역시 “한국에서는 여성이 성폭력을 고발하면 가해자는 대부분 ‘생각나지 않는다’고 부인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가해자를 옹호하면서 ‘꽃뱀론’을 들고 나온다”고 지적했다. ‘본인의 부인→주변의 옹호→꽃뱀론’으로 이어지는 가해자의 전형적인 스토리는 사실상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려는 의식이 깔려 있음을 방증한다.또한 ‘나는 성차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가 성차별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남성도 여전히 많다. 최근 한국행정연구원이 ‘신뢰받는 공직사회’를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여성의 고위직 승진이 어려운가’를 묻는 질문에 남성은 전체 응답자의 50% 이상이 ‘어려움이 없다’고 답한 반면, 여성은 응답자의 80%가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미투운동에 대해 여성은 대부분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려 애쓴다. 40대 직장인 박모 씨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도 상사의 성추행이 비일비재하다. 나 역시 사회 초년생일 때 한 상사로부터 몇 차례 추행을 당했다. 그때 나는 ‘불이익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공론화하지 못했다. 그런데 몇 해 전 한 여자 후배가 같은 상사로부터 똑같이 성추행을 당해 결국 회사를 그만두는 모습을 보면서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 특히 최근 미투운동이 확산될수록 ‘그때 내가 용기를 냈더라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자주 든다”고 말했다.
박씨의 고백처럼 성희롱·성폭행 피해를 입은 여성 상당수가 입을 닫는다. 설령 용기를 내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더라도 명예훼손죄(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형법상(제307조 제1항) 허위사실뿐 아니라 진실한 사실을 말한 경우에도 명예훼손죄가 성립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비영리 사단법인 오픈넷(Open Net)은 ‘우리나라에서 미투운동이 어려운 이유-진실적시 명예훼손죄와 임시조치 제도’라는 성명서를 냈다. 오픈넷 관계자는 “우리 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서지현 검사와 같은 사례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법제와 임시조치제도 때문에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내부 고발이 크게 위축되거나 방해받고 있다. 유엔(UN) 자유권규약위원회도 진실 적시에 대한 형사처벌을 금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월에는 관련 법안도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의원은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 혐의로 고소 및 고발되는 경우 검찰 기소 전이나 재판 확정 전까지 사실상 무고와 관련된 조사와 재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외에도 현재 국회에는 미투운동의 확산으로 성폭력 방지 및 사후 대처와 관련된 법안이 6건이나 발의된 상태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함께 인식하자는 분위기가 일고 있는 만큼 관련 법안들이 국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피해자 옥죄는 ‘역(逆)고소’
경남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으로 배달돼온 서지현 검사를 응원하는 꽃바구니들. 통영지청은 두 달간 병가를 내고 휴식을 취하는 서 검사에게 전달이 어렵다는 이유로 꽃바구니를 받지 않고 있다(왼쪽). 여성-엄마민주당 당원들이 1월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0년 당시 서 검사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안태근 전 검사를 규탄하고 있다. [뉴스1, 뉴시스]
문제는 성폭력 사건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이 성폭력 범죄 피해자를 무고죄로 의심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피해자가 스스로 신고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에게 성폭력 증거를 모두 입증하라는 식의 조사 방법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성폭력은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증거를 입증하거나 수집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없는 사실을 꾸며낼 수 있다는 의혹이 강한 범죄 유형으로 분류돼 있다. 실제로 수사관들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전형적·고전적인 몇 가지 ‘상’을 만들어놓고 그 틀에 끼워 맞춰 수사를 진행한다는 내용이 학계에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경찰, 검찰 조사관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이들이 변하지 않고서는 입법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미투운동의 확산을 ‘여성들의 촛불 시위’라고 표현했다.
전문가는 대부분 미투운동이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그동안 크게 이슈화되지 못했을 뿐, 이미 사회 곳곳에서 미투운동이 활발히 전개돼온 덕분이다. 실제로 미국 미투운동보다 1년 앞선 2016년 10월부터 한국에서는 문화계 성폭력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김현 시인이 ‘21세기 문학’ 가을호에 ‘질문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한국 문단에 퍼져 있는 여성 혐오와 남성 문인들의 성적 추행을 폭로한 것이 기폭제가 됐다.
이후 많은 문인이 트위터를 중심으로 문인 또는 평론가의 성범죄를 폭로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게재했다. 여러 피해자가 해시태그 ‘#문단_내_성폭행’을 붙여 피해를 고발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중견 작가 박범신이 방송작가, 출판사 편집자를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중견시인 배용제는 지난해 미성년 제자들을 상대로 성폭행 등을 저지른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문화계에서 먼저 퍼진 미투운동
‘#문단_내_성폭력’은 ‘#문화계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등 한국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지난해 12월에는 최영미 시인이 계간지 ‘황해문화’ 겨울호에 ‘괴물’이란 제목의 시를 발표해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해당 시는 국내 한 원로 시인을 겨냥하고 있다. 시는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Me too(미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그동안 문화예술계 내 고발은 주로 수습생 등 사회적 지위가 확고하지 않은 여성들의 주도로 이뤄진 반면, 이번 검찰발(發) 미투운동 확산은 높은 위치의 여성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희롱·성폭행 피해자 역시 적극적으로 피해를 알리고 외부기관에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 노동위원회를 비롯해 지방고용노동관서, 국가인권위원회,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긴급전화, 대한법률구조공단,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민우회 등 관련 사건을 상담할 기관이 적잖다.
현재 고용노동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대응 매뉴얼(근로자용)’에 따르면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는 5가지를 꼭 기억해야 한다. △상대에게 단호하게 거부 의사 표현 △자신이 속한 직장 내에서 성희롱에 대처한 선례 검토 △증거 수집(①문자나 편지 등 내용증명을 통해 행위자에 거부 의사를 밝힌다 ②만나서 이야기할 경우 자신의 입장을 잘 정리해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③상대방과 대화 내용을 녹음하는 것도 법적으로 허용 ④행위자와 직접 만나기 어렵다면 가족이나 친구 등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만남) △직장 내 해결 절차 이용 △외부기간을 통한 구제 방법 모색 등이다.
성희롱 문제 해결을 돕는 외부기관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0505-515-5050), 국가인권위원회(국번 없이 1331), 한국성폭력상담소(02-338-5801), 여성긴급전화(국번 없이 1336), 대한법률구조공단(국번 없이 132), 한국여성의전화(02-2263-6465), 한국여성민우회(02-335-1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