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 톰블리, ‘The Italians’.
세잔 이후 완벽한 표현보다 붓 터치를 그대로 살리는 형식이 현대미술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런데 이런 자유분방한 붓 터치가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잘 다듬어진 붓질이나 선묘(線描)보다 회화에 있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요소로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구의 현대미술에 박혀 있는 편견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그것이 더 회화적으로 예술적인 내용을 지니기 때문일까?
서구의 회화에서뿐 아니라 동양화에서도 필선의 자유로움과 서투름에 가까운 개성이나 파격은 종종 예술적인 독자성의 표현처럼 받아들여진다. 동양의 회화는 오히려 20세기 서구회화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세련됨과 서투름을 모두 아우르는 중요한 모델을 제시해왔다.
프랑스어에서 서투름은 신체의 ‘왼쪽(gauche)’을 의미하고, 왼쪽은 ‘불안함(sinistre)’을 의미한다. 프랑스 고전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쓴 화가 톰블리(Cy Twombly)에 대한 글에서 회화에서의 ‘서투름’은 이렇게 표현돼 있다.
“그는 방향을 보지 못하며 자신의 몸짓을 가누지 못한다. 오직 그의 손이, 그것의 도구적 능력이 아닌 욕망이 그를 인도한다. 반대로 눈은 이성, 확신, 경험, 사실과 같은 통제하고 조절하며 모방하는 것으로, 과거의 모든 미술은 일종의 억압된 합리성에 전적으로 종속된 눈의 미술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왼쪽’ 혹은 ‘왼손잡이’는 신체적 결함을 지닌, 일종의 장님의 특질을 나타낸다. 즉, 서투름의 미술은 손과 눈을 분리시키는, ‘빛’ 없이 그리는 미술이다. 다시 말해 서투름은 눈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또 다른 현대미술 흐름을 주도한 마르셀 뒤샹은 시각적 사고를 눈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주요한 예술적 방법론으로 삼았다. 그는 ‘망막적 전율(retinal shudder)’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남기기도 했다. 서투름은 ‘눈이 상징하는 예술의 역사로부터의 해방’을 테마로 하는 현대미술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더없이 중요한 회화의 형식적 요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