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0

2006.08.29

염치와 정의를 상실한 사회

  •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입력2006-08-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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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치와 정의를 상실한 사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를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믿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로 유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은 외롭고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도시국가를 건설할 때 비로소 자신과 가족을 지킬 힘을 얻는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도시의 구성원들이 ‘정치의 기술(politike techne)’을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가 사람들에게 내세운 일화는 이렇다. 제우스가 그리스인이 멸망하지 않도록 지상에 헤르메스를 메신저로 보내 ‘정치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두 가지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다. 하나는 ‘아이도스(aidos)’요, 또 하나는 ‘디케(dike)’였다. ‘아이도스’는 일종의 수치심, 염치라는 뜻이다. 염치를 아는 사람들은 쉽게 배신하지않고, 자기와 다른 의견을 귀담아들을 줄 안다. ‘디케’란 일종의 정의감을 뜻한다. ‘디케’를 지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할 줄 안다. 제우스는 이 두 가지 선물을 지상에 내려보내 인간 스스로 극심한 의견 대립을 해소하는 도구로 사용하도록 했다.

    흔히 민주주의라면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나 다수결의 원칙 등을 떠올리지만, 실상 민주주의의 조건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염치와 배려 같은 인성(人性)이지 결코 제도가 아니다. 외형적인 법과 제도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법에 따른 자유선거가 보장된 곳에 비민주적 관행이 횡행하는 사례를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무르익는 듯했다. 그 정부가 후반기에 접어든 요즘, 씁쓸하게도 성숙한 민주주의의 증거는 눈을 비비고 찾아도 보이질 않는다. 출범 초기부터 줄곧 문제가 됐던 ‘코드 인사’가 최근에는 인사 청탁(인사 협의)에 따른 경질 파문으로 불거지고, 그에 대한 여야 간의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국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코드 인사는 그 자체로서 염치를 상실한 행위다. 이는 인사 당사자는 물론 납세자에 대해서도 ‘디케(정의감)’를 상실한 행위이기도 하다.

    人事 파문 공방 한국 정치의 현주소



    비판세력에 대한 대응방식이나 자세 측면에서도 그렇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어찌 보면 당연한 권리인 인사권을 행사하면서도 여야 간에 공방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면, ‘아이도스’와 ‘디케’가 상실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쉽게 말해 염치가 없고, 정의 의식이 결여됐기 때문에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최근 유진룡 전 문광부차관 경질과 관련해 청와대에서 신문유통원 운영에 대한 업무능력을 이유로 들었음에도 설득력을 전혀 얻지 못하는 원인 역시 인사권자의 심성이 담백하게 다가오지 않는 데 있다.

    기원전 수세기 전에 이미 프로타고라스가 갈파했듯, 정치란 상호 대립되는 의견을 얼마나 절충하고 설득해 나가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매우 인간적인 행위다. 그러자면 서로 부끄럼을 알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상호 의견 조정은 말이나 글을 통해 이해와 설득을 구하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무슨 정부기구의 출범, 어떤 세금제도의 발휘, 생소한 정부기능의 추가를 통해 얻어지는 것은 상호 반목과 대립의 악순환뿐이다. 서로 다름을 배척하고, 진정성이 결여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무능한 정치는 없다. 제우스가 염려한 바에 따르면, 무능한 정치는 인간사회를 파괴시켜 나약한 개인으로 되돌리고 종국에는 인간을 괴멸시킨다.

    인터넷을 통한 거침없는 의견 표현과 자유선거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와 닮은꼴이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민주주의의 맹점으로 꼽히는 가장 저급한 숫자놀음인 ‘다수결의 원칙’에서 한 발짝 나와, 이제는 헤르메스의 선물인 ‘아이도스’와 ‘디케’를 학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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