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2

2006.04.25

꽃그림일까, 그림꽃일까

  • 김준기 미술평론가

    입력2006-04-24 09: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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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그림일까, 그림꽃일까
    꽃이라는 게 워낙 오랫동안 화가들이 다뤄온 소재인지라 아무나 그린다고 해서 다 동시대성을 가진 예술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한수정은 기존의 작업과 비교해봤을 때 파격에 가까운 변신을 감행함으로써 그가 꽃그림을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모은다. 그동안 그는 전시장에서만 실현할 수 있는 현장 설치작업을 해왔다. 커다란 바코드를 여러 장 겹쳐서 늘어뜨리는 작업이나 바닥이나 벽에 라인드로잉 설치작업을 해오던 작가가 갑자기 캔버스를 들고 나온 것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다듬어 작품을 만들어내는 회화의 잔재미를 느낄 겨를도 없었던 그가 작업실에 앉아서 꽃을 그렸다는 게 뭔가 심상찮다.

    한수정이 그린 꽃그림은 뭔가 확 바뀌었다는 인상을 주긴 하지만, 그가 해왔던 작업들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이번 꽃그림들은 라인드로잉과 그림자 작업들이 보여줬던 형상과 환영(幻影)의 문제를 변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꽃그림이 ‘시각의 고정성에 대한 도전’으로서 ‘꽃의 동물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파란 해바라기, 코끼리가죽 같은 아이리스, 주름진 꽃잎 등 실재의 꽃과는 다른 그림꽃을 보여줌으로써 꽃이라는 식물로부터 동물성을 끌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꽃이 가진 고유의 색상과 형태를 ‘한수정 마음대로’- 회화적 재현 체계를 통해서 - 바꿔 대상의 리얼리티를 뒤집고 있다.

    전시장에서 하는 설치작업과 작업실에서 그리는 그림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차분하게 그림 그리는 일이 예술가 자신에게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이었는지 자분자분 얘기한다. “꽃을 선택했다기보다는 그림을 선택했다”는 그의 말마따나,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새로움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그림 그리는 일 자체에 몰입해 크고 작은 그림 몇 점을 뽑아낸 것이다. 대상물을 평면 위에 옮겨놓는 일, 즉 그림 그리기는 인간의 손끝에서 나오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 행위이자 가장 발달한 눈속임 기술이다. 그러고 보니 한수정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꽃그림이 아니라 그림꽃인지도 모르겠다. 4월28일까지, 갤러리 스케이프, 02-3143-4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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