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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교육 감히 어딜” … 독야청청 ‘한일고’

학원 한 번 안 다녀도 전국 최상위 실력 … 자기 주도적 맞춤학습 ‘영재교육’ 실천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私교육 감히 어딜” … 독야청청 ‘한일고’

“私교육 감히 어딜” … 독야청청 ‘한일고’

음악교사의 지도에 따라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한일고 1학년 학생들.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끝나고 하루가 지난 11월6일 오후 8시. 칠흑 같은어둠이 깔린 농촌마을의 한 산등성이에서 한 건물만이 불을 밝히고 있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의 한일고등학교(이하 한일고)가 바로 그곳. 오후 7시부터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한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다. 모의 수능시험을 치르고 긴장이 풀릴 법도 하건만, 학생들은 시험에서 틀린 문제를 복습하고 있었다. 몇몇 남학생은 졸음을 쫓기 위해, 교실 뒤편으로 나와 서서 영어 문장을 외우는 중이다. 아예 복도로 책상을 들고 나와 중얼거리며 수학문제를 푸는 학생도 눈에 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뚫어져라 책을 쳐다보는 이어폰족도 있다. 일부 학생들은 미진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교실을 옮겨다니며 학교 선생님의 영어·수학 특강을 듣기도 한다. 이들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정까지 그야말로 ‘자율학습’을 실천하는 것. 서울이나 대도시 학생들이 사교육 기관을 전전하며 보충학습을 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일고가 ‘사교육 불패 신화’에 도전하는 새로운 학교로 떠오르고 있다. 아무리 사교육을 원해도 받을 수 없는 한일고의 지정학적 위치와 학생들의 의지가 맞물려 새로운 공교육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 학교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논과 밭뿐. 학원 간판이나 유흥가는 찾아볼 수도 없다. 주변 축사에서 은은히 풍기는 ‘고향의 냄새’가 전원의 정취를 더한다. ‘환경 공해’와 ‘사교육 공해’에서 모두 해방된 공간인 셈이다.

한일고는 500여명의 전교생이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비평준화 인문계 사립자율학교다. 외국어고등학교나 과학고등학교 등의 특수목적고등학교, 민족사관고등학교 등의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와 구분되는 ‘농어촌 자율학교’를 지향한다. 개교 16년째를 맞은 한일고 학생들의 학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9월 실시된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모의 수능에서 이 학교 학생들이 기록한 평균점수는 400점 만점에 319.8점(인문)∼331점(자연). 이는 2등급 안에 들 정도로 전국 최상위권 점수다. 올해는 전체 학생 중 42%인 75명의 학생들이 서울대, 연·고대, KAIST(한국과학기술원) 등 최상위권 대학에 입학해 화제를 모았다.

농촌마을 … 전교생 기숙사 생활

“私교육 감히 어딜” … 독야청청 ‘한일고’

상공에서 내려다본 한일고 전경.

이렇듯 뛰어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음성적으로 과외를 받는 학생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기자 일행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기습 방문한 2학년 2반 학생들은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사교육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어넘긴다. 이 반의 이규민군(17)은 “선배들 중에는 방학 기간 동안 학원에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학교에 남아 혼자 공부한 선배들이 오히려 더 높은 성적을 올리는 것을 봤다”며 “대부분의 아이들은 오히려 학원 가는 것을 손해라 여긴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이미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 데다 ‘자기 주도적 학습’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에서는 영어교과 수업과는 별도로 토익, 토플, 텝스 등을 가르칠 뿐 아니라, 영어회화 수업은 원어민 교사가 담당한다. 교사들도 33명 중 14명이 석·박사 출신으로 실력이 검증된 인물들. 또 3명은 유명학원에서 스카우트한 실력파 강사들이다. 입학 담당 최용희 교사는 “학생들이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학원에 가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면서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가라고 권장하지만, 이마저도 거부한 채 서로 남아서 공부하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학부모들도 학교 분위기를 상당히 신뢰하는 편. 특히 유명학원을 운영하는 학원장도 자신의 자녀를 보내 눈길을 끈다. 대전에서 14년간 유명 입시학원을 운영해온 최헌규씨는 “두 아들을 모두 한일고에 보냈다”며 “학원을 운영하면서도 두 아들에겐 전혀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두 자녀가 학교교육을 통해 자기 주도적 학습의 중요성을 깨우쳤기 때문이란다. 성교육 전문가로 유명한 구성애씨의 아들은 지난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구씨는 “중학교 때 그토록 놀기 좋아하던 아들이 학교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서 “한일고 졸업생들은 학원교육에 익숙해진 학생들보다 대학에서 더욱 자생력을 발한다”고 말했다.

“私교육 감히 어딜” … 독야청청 ‘한일고’

한일고 학생들은 졸업 전까지 태권도 1단 이상의 유단자가 된다.1학년 수학시간. 한 학생이 푼 문제를 수학교사가 설명하고 있다. 오전 1시 이후엔, 학생들이 기숙사 연등실에서 모자란 공부를 계속한다(위부터).

외딴곳에 자리잡은 ‘기숙학교’ 하면, 규율이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를 떠올리게 마련. 실제로 이 학교 학생들은 오전 6시에 기상해 오전 1시에 잠자리에 드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깨끗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운동장에서 점호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은 오후 4시까지 정규수업을 하고 자정까지 자율학습을 한다. 오전 1시 이후엔 기숙사 연등실에서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한다. 뛰어난 학생들 사이에서 경쟁이 이뤄지는 만큼, 매일매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은 당연하다.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이 모인 데다 선후배 관계도 엄격해 ‘군대’를 연상시킨다. 휴대전화가 적발되거나 담배를 피울 경우, ‘부모님 소환’이나 ‘기숙사 퇴실 조치’ 등 강력한 처벌이 내려진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학생들은 생기발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고, 다투어 발표를 하는 적극적인 모습에서 입시에 찌든 ‘우울한 고교생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자율성’을 상당부분 존중하기 때문. 실제로 한일고는 교복, 교문, 공해가 없는 ‘3무(無) 학교’로 유명하다. 학교생활의 외형은 틀에 박혀 있을지 모르나 내부적으로는 나름의 ‘자율성’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농어촌 자율학교’라는 명목 하에 또 다른 입시학원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부의 우려에 대해 이 학교 양교석 교장은 자신감을 내비친다. ‘명문대 진학률’만을 강조하는 일반 명문고와 차별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갖췄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일고 학생들은 ‘문(文)’뿐만 아니라 ‘체(體)’와 ‘예(藝)’에도 강하다. 전교생 모두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태권도 수업을 받아 졸업할 땐 1단 이상의 유단자가 된다. 기타도 의무적으로 배워 학교 교정에선 학생들이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떠나지 않는다. 방학을 이용해선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면서 다른 나라 학생들과 문화교류도 갖는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학생들에게 전인교육을 하고자 하는 학교측의 배려로 기획된 것이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나 자율학교가 늘어나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중 하나는 바로 ‘귀족학교’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다. 교육의 기회가 가진 자에게 집중되고, 계층간 교육 격차를 벌려놓을 수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이 학교 입학 담당 최용희 교사는 “실제로 상류층의 자녀보다는 교육에 관심이 많은 중산층 학부모들이 자녀를 한일고에 보내고 있다”며 “한일고는 귀족학교가 아니라 ‘영재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라고 강조했다. 실제 학부모들이 부담하는 학비는 분기당 등록금 23만여원, 기숙사비 매월 22만원, 특기적성교육비 2만원을 합해 월 38만~45만원에 불과하다. 자녀 사교육비로 100만원을 우습게 지출하는 현 상황에서는 상당히 저렴한 금액이다. 김종목 교감은 “한일고가 사교육 없이 영재교육을 실현하는 대안학교로 자리잡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양교석 교장은 한국에서 교육의 다양성과 수월성이 더욱 보장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획일성’을 지향하는 나라의 교육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맑은 환경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공부할 수 있는 제2, 제3의 한일고가 탄생하기를 기대합니다.”





주간동아 2003.11.20 410호 (p56~57)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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