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8일 오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 국정홍보처장과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오홍근씨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으로 임명되기 직전 가스안전공사 사장후보평가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모두 5명의 사장 후보자가 올라왔다. 오홍근 현 사장 외에 가스안전공사 부사장을 지내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직한 K씨, 공사 산하 연구원장을 지낸 O씨, 공사 현직 L이사, 민간 연구소장 S씨 등이었다. 오사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스 및 안전 분야와 나름대로 관련 있는 전·현직 전문가들이다.
후보자 본인이 추천된 사실 모르는 경우도
그러나 정작 이들은 자신이 사장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K 전 부사장은 “후보평가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오홍근씨가 사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원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는데 최종 후보가 결정된 뒤 내 이름도 후보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은 현직 이사 L씨도 마찬가지. L씨 역시 “사장 내정 사실이 알려진 이후 나도 사장 후보에 올랐던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L씨는 “전·현직 이사 중 한 명을 사장 후보로 추천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내 이름이 올랐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장 후보에 올랐던 S씨는 “산하기관 사장 후보는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게 상식인데 누가 지원하겠느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낙하산 논란을 빚은 이날 사장후보평가위원회에서는 후보자들에 대해 별다른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부 참석자들은 “가스안전공사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엇보다 홍보가 중요하니까 언론인 출신의 오홍근 후보가 적임”이라는 말이 오갔다고 전했다. 사전내정설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당연직 위원으로 사장후보평가위원회에 참여했던 산업자원부 김재현 기획관리실장(현 무역투자실장)은 오홍근 전 공보수석이 추천된 배경 등과 관련해 상부의 어떤 지시나 요구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말하기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최근 아태재단 관계자에게 진급 관련 청탁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수용 전 해군참모총장이 사장으로 임명된 한국석유공사의 경우도 들러리 후보를 내세운 것은 마찬가지. 지난해 4월 열린 석유공사 사장추천위원회에는 이수용 후보 외에 국책연구기관장과 대학 학장을 지낸 S씨가 추천되었으나 정작 S씨는 추천위원회가 열릴 당시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형식적으로는 비상임이사들이 추천한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대부분 추천위원들은 산자부에서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들러리 후보로 S씨를 끼워넣었던 것으로 설명한다. 일부 추천위원들은 “S씨의 이력서를 검토하긴 했지만 S씨가 현장 면접에 나오지 않아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본인이 나서서 사장 후보를 고사한 것은 당연한 일. 사장추천위원회에서는 일부 민간위원들이 이런 점을 문제 삼아 ‘위원직을 사퇴하라’고까지 주장하는 등 격앙된 분위기까지 연출되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추천위원회를 연기하면서 민간위원들에게 추가 추천을 의뢰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차 추천위원회에서는 새로 추천된 정부투자기관장 출신 B씨를 포함한 후보들의 이력서가 검토되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후보를 불러 면접하자는 의견이 나와 이수용 총장이 심야에 위원회가 열리던 강남의 한 호텔로 불려 나오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맞수가 없었던’ 이수용 후보의 승리. 당시 사장추천위에 참여했던 한 민간위원은 “민간위원 수를 과반수가 되지 못하도록 하고, 이런 식으로 본인도 모르는 들러리 후보를 세우는데 누가 응모하겠느냐”고 지적했다.
경실련이 지난해 3월 이후 새로 사장을 임명한 9개 정부투자기관을 대상으로 사장추천위원회 운영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장추천위원회가 외부 전문기관에 후보 추천을 의뢰한 기관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광업진흥공사, 석유공사 등 4개 기관은 아예 후보 공모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후보 공모 여부는 사장추천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들 정부투자기관은 제도만 만들어 놓았을 뿐 한 번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6월 전직 국회의원인 김진배씨를 사장으로 뽑은 농수산물유통공사 사장추천위원회나 병무청장 출신의 오점록씨를 사장에 선임한 한국도로공사 사장추천위원회는 제대로 된 회의록조차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투자기관이 이 정도라면 이사회가 아닌 장관이 기관장후보 평가위원회 구성 권한을 가진 정부 산하기관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하기관의 경우 ‘낙하산 인사를 없애고 공기업 사장 선임과정을 공정하게 하겠다’는 정부의 거듭된 약속과 달리 낙하산 인사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통로를 열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경실련 조사에서도 지난해 3월 이후 사장이 바뀐 9개 산하기관 중 외부 공모를 통해 사장을 뽑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들어 공공부문 개혁의 상징처럼 내세워온 공기업 사장추천위원회가 유명무실화됨에 따라 민간위원으로 참여하는 중립적 인사들조차 ‘위원회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투자기관 사장추천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민간위원은 “외부 공모 절차를 지극히 형식적으로 거친 상태에서 후보자의 비중이나 경력이 현저히 차이나는 인사들을 놓고 뽑으라고 하면 당연히 정부 주변인사나 검증된 인사들을 뽑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민간위원을 사장추천위원회의 과반수가 되도록 임명하고 회의록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제도 개선보다는 각 기관의 의지와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대 오연천 행정대학원장은 “최고경영자(CEO)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다 보니 사장 후보를 추천받더라도 능력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 지원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구색 맞추기’로 함께 끼어들어간 후보보다는 유관부처의 고위 관료 출신이나 기관장 출신이 업무능력 면에서 보면 비교우위를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
오교수는 “좋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서치펌(search firm)에서 광범위하게 후보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또 정말 적임자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에서도 삼고초려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보다는 유명무실한 사장추천 제도를 손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대중 정부가 내세워온 공기업 개혁의 최종 성과는 결국 성공보다는 실패로 굳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자리에는 모두 5명의 사장 후보자가 올라왔다. 오홍근 현 사장 외에 가스안전공사 부사장을 지내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퇴직한 K씨, 공사 산하 연구원장을 지낸 O씨, 공사 현직 L이사, 민간 연구소장 S씨 등이었다. 오사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스 및 안전 분야와 나름대로 관련 있는 전·현직 전문가들이다.
후보자 본인이 추천된 사실 모르는 경우도
그러나 정작 이들은 자신이 사장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K 전 부사장은 “후보평가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오홍근씨가 사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원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는데 최종 후보가 결정된 뒤 내 이름도 후보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은 현직 이사 L씨도 마찬가지. L씨 역시 “사장 내정 사실이 알려진 이후 나도 사장 후보에 올랐던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L씨는 “전·현직 이사 중 한 명을 사장 후보로 추천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내 이름이 올랐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장 후보에 올랐던 S씨는 “산하기관 사장 후보는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게 상식인데 누가 지원하겠느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낙하산 논란을 빚은 이날 사장후보평가위원회에서는 후보자들에 대해 별다른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부 참석자들은 “가스안전공사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엇보다 홍보가 중요하니까 언론인 출신의 오홍근 후보가 적임”이라는 말이 오갔다고 전했다. 사전내정설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당연직 위원으로 사장후보평가위원회에 참여했던 산업자원부 김재현 기획관리실장(현 무역투자실장)은 오홍근 전 공보수석이 추천된 배경 등과 관련해 상부의 어떤 지시나 요구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말하기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최근 아태재단 관계자에게 진급 관련 청탁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수용 전 해군참모총장이 사장으로 임명된 한국석유공사의 경우도 들러리 후보를 내세운 것은 마찬가지. 지난해 4월 열린 석유공사 사장추천위원회에는 이수용 후보 외에 국책연구기관장과 대학 학장을 지낸 S씨가 추천되었으나 정작 S씨는 추천위원회가 열릴 당시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형식적으로는 비상임이사들이 추천한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대부분 추천위원들은 산자부에서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들러리 후보로 S씨를 끼워넣었던 것으로 설명한다. 일부 추천위원들은 “S씨의 이력서를 검토하긴 했지만 S씨가 현장 면접에 나오지 않아 탈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본인이 나서서 사장 후보를 고사한 것은 당연한 일. 사장추천위원회에서는 일부 민간위원들이 이런 점을 문제 삼아 ‘위원직을 사퇴하라’고까지 주장하는 등 격앙된 분위기까지 연출되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추천위원회를 연기하면서 민간위원들에게 추가 추천을 의뢰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차 추천위원회에서는 새로 추천된 정부투자기관장 출신 B씨를 포함한 후보들의 이력서가 검토되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후보를 불러 면접하자는 의견이 나와 이수용 총장이 심야에 위원회가 열리던 강남의 한 호텔로 불려 나오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맞수가 없었던’ 이수용 후보의 승리. 당시 사장추천위에 참여했던 한 민간위원은 “민간위원 수를 과반수가 되지 못하도록 하고, 이런 식으로 본인도 모르는 들러리 후보를 세우는데 누가 응모하겠느냐”고 지적했다.
경실련이 지난해 3월 이후 새로 사장을 임명한 9개 정부투자기관을 대상으로 사장추천위원회 운영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장추천위원회가 외부 전문기관에 후보 추천을 의뢰한 기관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광업진흥공사, 석유공사 등 4개 기관은 아예 후보 공모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후보 공모 여부는 사장추천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들 정부투자기관은 제도만 만들어 놓았을 뿐 한 번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6월 전직 국회의원인 김진배씨를 사장으로 뽑은 농수산물유통공사 사장추천위원회나 병무청장 출신의 오점록씨를 사장에 선임한 한국도로공사 사장추천위원회는 제대로 된 회의록조차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투자기관이 이 정도라면 이사회가 아닌 장관이 기관장후보 평가위원회 구성 권한을 가진 정부 산하기관의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하기관의 경우 ‘낙하산 인사를 없애고 공기업 사장 선임과정을 공정하게 하겠다’는 정부의 거듭된 약속과 달리 낙하산 인사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통로를 열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경실련 조사에서도 지난해 3월 이후 사장이 바뀐 9개 산하기관 중 외부 공모를 통해 사장을 뽑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들어 공공부문 개혁의 상징처럼 내세워온 공기업 사장추천위원회가 유명무실화됨에 따라 민간위원으로 참여하는 중립적 인사들조차 ‘위원회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투자기관 사장추천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민간위원은 “외부 공모 절차를 지극히 형식적으로 거친 상태에서 후보자의 비중이나 경력이 현저히 차이나는 인사들을 놓고 뽑으라고 하면 당연히 정부 주변인사나 검증된 인사들을 뽑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민간위원을 사장추천위원회의 과반수가 되도록 임명하고 회의록 작성을 의무화하는 등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제도 개선보다는 각 기관의 의지와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서울대 오연천 행정대학원장은 “최고경영자(CEO)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하다 보니 사장 후보를 추천받더라도 능력과 경험을 갖춘 사람이 지원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구색 맞추기’로 함께 끼어들어간 후보보다는 유관부처의 고위 관료 출신이나 기관장 출신이 업무능력 면에서 보면 비교우위를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
오교수는 “좋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서치펌(search firm)에서 광범위하게 후보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또 정말 적임자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정부에서도 삼고초려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보다는 유명무실한 사장추천 제도를 손대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대중 정부가 내세워온 공기업 개혁의 최종 성과는 결국 성공보다는 실패로 굳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