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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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키워드로 보는 80년대 … 최초(?)의 명품 ‘나이키’, 외화의 상징 ‘맥가이버’, 그리고 ‘프로야구’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9-15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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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80년대를 다룬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갤러그 당시 학생들을 사로잡았던 ‘뿅뿅뿅’ 오락의 대표주자는 갤러그였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 담배 연기 자욱한 오락실 기계 위에 50원짜리 동전을 쌓아놓고는 오직 갤러그에만 매달렸다. 계기판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점수는 99만9990점이었지만 그 점수마저 넘어버리면 게임은 0점에서 다시 시작됐다. 그래서 오락실 주인들은 100만점을 넘기면 100원을 쥐어주며 다른 오락실로 쫓아버리는 방법을 썼다. 현란한 갤러그 뒤편에서는 보글보글, 너구리, 방구차 같은 구수한 오락도 인기를 끌었다.

    나이키 우리나라 최초의 명품 브랜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를 듯한 역동적인 붉은 마크는 당대 청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나이키의 출현으로 범표 타이거, 말표 까발로, 기차표 월드컵, 종표 슈퍼카미트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표’ 운동화들은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이키(Nike) 를 흉내낸 나이스(Nice)도 화제를 모았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디스코바지 허리에서 히프선을 살려준 후 아래로 내려올수록 통이 좁아지는 바지, 일명 ‘디스코바지’는 그 시절 가장 유행한 패션 아이템이었다. 여자들은 어깨에 두툼히 ‘뽕’을 넣어 각을 살린 박스 스타일의 재킷을 입고, 종아리 아래로 ‘착’ 달라붙는 디스코바지를 입은 채 거리를 누볐다. 디스코바지의 인기는 남북 국경도 넘어, 1989년 평양을 찾은 임수경양이 디스코바지(북한식으로는 ‘쫑때바지’)를 입은 것을 보고는 북한 인민들 사이에서도 디스코바지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롤러장 80년대 세계 음악계를 강타한 유로 댄스 열풍이 ‘롤러장’에 불었다. ‘모던 토킹’과 ‘런던 보이스’의 음악들은 그 무렵 ‘롤러장’에서 지치지도 않고 흘러나왔다. 핑클 퍼머와 두 장 겹쳐 입은 티셔츠, 죠다쉬 청바지로 멋을 부린 아이들은 ‘런던 나이트’의 디스코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잘나가는’ 학생들은 공중 두 바퀴 반 점프를 성공시켜 인근 학교에까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맥가이버 누구나 한번쯤은 손목시계에 대고 ‘키트’를 불렀다. 머리가 좀 긴 남자 아이들의 별명은 하나같이 ‘맥가이버’였다. 바야흐로 외화 시리즈의 전성기였다. ‘전격 Z 작전’과 ‘맥가이버’ 외에도 ‘에어 울프’ ‘천사들의 합창’ ‘A특공대’ ‘말괄량이 삐삐’ ‘코스비 가족 만세’ ‘V’ 등 갖가지 외화가 인기를 모았다. ‘천사들의 합창’의 히메나 선생님이 실은 유명 포르노 배우라는 소문이 돌아 학생들이 멕시코 잡지를 구하기 위해 명동 거리를 뒤지는 등 당시 외화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당대 최고의 인기 간식 거리였던 ‘뽑기’

    불량식품 학교 앞 골목길에는 언제나 뽑기 아저씨가 있었다. 국자에 설탕을 녹이다 소다를 넣어 부풀린 뒤 납작하게 눌러 갖가지 모양을 찍어주는 ‘뽑기’는 모양대로 뜯어 가져가면 한 개를 더 주었다. 짧은 빨대 속에서 새콤달콤한 고체를 뽑아 먹는 ‘아폴로’, 쫄깃쫄깃한 ‘쫀듸기’, 분홍색 ‘쏘세지’에 빵가루를 잔뜩 묻혀 시커먼 기름에 튀겨낸 ‘핫도그’도 인기였다. 뽑기 아저씨는 으레 덤블링도 같이 했는데, 덤블링 타다 지치면 내려와 뽑기를 하고, 돈을 다 쓰면 공터에서 구슬치기를 했다. 그렇게 하루 해가 지곤 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학생들의 책받침을 장식했던 주윤발

    성냥개비 성냥개비 한 개를 입에 물고 롱 코트를 휘날리며 쌍권총을 쏘아대던 ‘영웅본색’의 주윤발은 강렬했다. 그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주윤발의 눈빛과 주윤발식 미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학생들의 책받침에는 어김없이 그의 사진이 들어 있었고, 남학생들은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며 복수를 다짐하던 주윤발을 본받아 싸구려 트렌치 코트를 입고 다녔다.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 홍콩 느와르 영화들이 줄지어 극장가를 평정하면서, 주윤발 외에도 장국영 유덕화 왕조현 등 홍콩 배우들이 한국 CF에 대거 등장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애국조회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교과서 첫 장에는 어김없이 국민교육헌장이 인쇄돼 있었고, 모든 국민은 비장한 애국자였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아침이면 ‘국민체조’로 체력을 단련했고, 오후 5시에는 온 동네에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례를 붙였다. 매주 월요일에는 전교생이 모이는 ‘애국조회’가 열렸는데,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언제나 누군가 한 명이 쓰러진 뒤에야 비로소 끝나곤 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죠다쉬 청바지계의 ‘나이키’는 단연 ‘죠다쉬’였다. 바지 뒷주머니에 말 머리 문양이 수놓여 있는 남빛 죠다쉬 청바지는 당시 ‘잘나가는’ 학생들의 필수품이었다. ‘롤러장’에 가면 가죽 재킷을 허리까지 걷어 올린 채 말머리를 흔들며 현란한 점프를 선보이는 당대의 ‘킹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엉덩이에 뛰는 말(죠다쉬), 발목에 무지갯빛 파라솔(아놀드 파머), 발등 옆에 붉은 부메랑(나이키)만 있으면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학생들의 책받침을 장식했던 소피 마르소.

    책받침 스타의 사진을 코팅해 만든 책받침은 당시 학생들의 필수품이었다. 소피 마르소·주윤발·브룩 쉴즈·마이클 잭슨 등이 인기를 모았고,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등 ‘토종 하이틴 스타’들도 이따금 등장하곤 했다. 직접 그린 그림이나 색색의 펜글씨로 시구를 적어 내려간 메모장, 은행잎, 단풍잎 등을 코팅해 선물하는 것도 유행했다. 문구점 앞에는 대개 ‘복사’보다 더 큰 글씨로 ‘코팅’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를 진행했던 가수 이문세씨

    테이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만을 들으려면 스스로 테이프를 만들어야 했다. 여러 카세트테이프에서 마음에 드는 곡만 선별한 뒤 테이프 분량에 맞추어 신중하게 재녹음하는 방식이었다. 테이프에 없는 음악을 들으려면 FM 라디오에 신청 엽서를 보내고는 방송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별밤’ ‘밤그대’ 같은 심야 FM 방송은 최고의 인기였다. 중간중간 디제이 멘트까지 집어넣은 이 귀한 테이프들은 대부분 너무 많이 듣느라 음질이 늘어지면서 사라져갔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1982년 프로야구 원년 리그에서 우승한 OB 베어스

    프로야구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즉시 거리 풍경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짬뽕공’을 던지며 놀던 동네 공터에서 비닐 글러브를 끼고, 야구 모자를 쓴 채 야구를 했다. 5000원을 내고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면 선수들이 들고 다니는 백팩 안에 야구 모자, 점퍼, 회원 카드 등을 담아주었다. 그래서 그 무렵 공터에는 프로야구단의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대거 등장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대통령, 장군 아니면 과학자였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거기에 ‘프로야구 선수’가 하나 추가되었다.

    ‘죠다쉬’ 입고 ‘롤러장’ 가던 시절
    회수권 버스 카드가 없던 시절, 학생들은 요란한 원색으로 만들어진 종이 회수권을 썼다. 버스 운전기사의 눈만 속이면 차비는 얼마든지 덜 낼 수 있었다. 회수권을 ‘조작’하는 각종 기술이 난무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0장 회수권 11장 만들기’. 10장 묶음의 회수권을 절취선보다 약 2~3mm씩 안으로 자르면 쉽게 11장이 만들어졌다. 용기 있는 축들은 절반으로 자른 회수권을 구기고 접어 꼬깃꼬깃하게 만든 다음 요금통에 던져넣거나, 당시 막 등장한 컬러 복사기를 이용해 아예 회수권을 위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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