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공원 관리사업소 강형욱 홍보팀장은 못내 아쉬운 눈치다. 서울대공원이 국내 초유의 ‘한국 표범’ 2세 번식에 성공했음에도 임신 및 출산 과정을 기록한 영상물 하나 남기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8월1일 일반에게 공개된 서울대공원의 한국 표범 새끼들과 어미.
멸종위기종인 한국 표범의 2세 출산은 서울대공원은 물론 국내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 이 때문에 서울대공원은 한국 표범을 ‘8월의 자랑스런 동물’로 선정했다. 우리나라에선 1962년 경남 합천 오도산에서 주민에 의해 생포된 한 마리가 마지막 야생 표범이다. 이에 앞서 60년 덕유산에서 포획된 다른 한 마리는 창경원에 기증된 뒤 매일 극진한 쇠고기 접대를 받다가 73년에 노화로 최후를 맞았다.
서울대공원이 남한 지역에선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표범의 종(種) 보전을 위해 중국 하얼빈의 한 동물원에서 아무르 표범(Amur Leopard) 암수 한 쌍을 들여온 때는 지난해 6월29일. 개목 고양잇과 동물인 표범은 전 세계적으로 7가지 아종(亞種)이 있다. 그중 과거 한국에 서식했던 표범은 아무르 표범과 같은 종이다. 아무르 표범은 주로 한국, 러시아 연해주의 아무르·우수리 지역, 중국 북부 등의 삼림지대나 수변 및 초원의 덤불 등지에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다. 하지만 그 개체 수는 몇십 마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미 표범이 90여 일을 지낸 산실(왼쪽)과 담당 사육사 엄기용 씨.
33년 만에 한국 표범 명맥 이어
이 두 녀석을 통해 33년 만에 한국 표범의 명맥을 잇겠다는 일념에 불탄 서울대공원 측은 합사(合飼)를 위해 창살을 가운데에 둔 채 암수 간의 ‘얼굴 익히기’에 돌입했다. 고양잇과 동물은 낯선 개체와 맞닥뜨리면 흔히 싸움부터 벌이는 탓이다. 게다가 서울대공원 측은 예전에 다른 아종의 표범 번식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 더욱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섯 달쯤 후인 지난해 12월경, 어느 정도 친숙해진 녀석들은 마침내 ‘합방’을 함으로써 ‘무명씨 부부’가 됐다. 사육사 엄 씨에 따르면, 야생 상태에서 표범의 발정기는 매년 2~3월. 하지만 동물원에선 수시로 발정기가 찾아온다고 한다.
“어느 날 암놈의 행동이 확 달라졌어. 먹이도 안 먹고, 몸을 옆으로 굴리는 거야. 그러고는 교미 자세를 취해. 발정기인 거지. 얼마 동안 교미하냐고? 일주일쯤 하는데, 횟수가 엄청나. 사람이 그렇게 하면 아마 죽을걸?”
엄 씨는 표범 부부가 일주일을 꼬박 붙어 있다가 떨어지는 걸 보고 착상(着床)에 성공했음을 감지했다고 한다. 임신이 안 되면 길게는 73일 뒤 발정기가 다시 찾아오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이때부터 엄 씨는 ‘철통보안’에 들어갔다. 임신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뿐. 통상적인 경우라면 임신 소식을 바로 소속 부서에 보고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1985년 서울대공원이 문을 열 때부터 21년간 줄곧 호랑이, 흑표범, 퓨마, 재규어 등 맹수 사육만 전담해온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도 표범은 난생처음이었다.
“임신 사실이 새어나가면 다른 직원의 출입이나 매스컴의 방문을 피할 수 없어. 그러면 어미가 굉장한 불안감을 느끼게 돼. 분만 직후도 마찬가지야. 안정이 최선이지.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어미는 제 새끼를 잡아먹어. 꼬리나 발 하나 정도 남겨두고 깡그리…. 그럼 말짱 도루묵 아냐?”
엄 씨는 해산을 앞둔 어미를 산실(産室)로 옮겼다. ‘남편’은 다른 우리에 격리시켰다. 어려운 부탁 끝에 기자가 들어가 본 표범의 산실은 햇빛과 소음이 차단된 적막한 공간. 그곳에서 어미 표범은 90여 일을 보냈다. 그동안은 엄 씨조차도 먹이를 줄 때를 빼곤 출입을 일절 삼갔다.
대신 어미가 좀더 아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오크통을 바닥에 시멘트로 고정시켜 ‘산실 속 산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대공원 모의원 동물복지과장은 “열대 조류관에 사는 대형 앵무류의 부화통으로 사용하기 위해 구입했던 오크통으로 더 작은 산실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침내 4월29일, 어미는 새끼 두 마리를 순산했다. 5마리까지 낳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게 낳은 편이다. 갓 태어난 새끼들의 몸길이는 15cm, 몸무게는 600g. 3개월여 지난 지금은 몸길이가 40cm, 몸무게는 2kg다.
“우리 국민들 너무 호랑이만 좋아해”
하지만 아직도 성별은 알지 못한다. 생식기를 살피면 암수 여부를 금세 알 수 있지만, 언제나 새끼 곁을 떠나지 않는 어미의 심사가 자칫 뒤틀리기라도 하면 사육사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 그래도 1년쯤 지나면 배뇨 자세를 보고 암수 감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암컷은 쪼그리고 앉아 소변을 보는 데 비해 수컷은 생식기를 뒤로 젖혀 오줌을 눈다. 자신의 영역 표시를 위한 것이다.
“맹수들만 돌보다 보니 긴장하는 게 버릇이 됐어. 퇴근 후에도 ‘우리의 자물쇠를 잘 채웠나’ 하는 의구심이 자꾸 들 정도야. 사고 나면 큰일이거든. 그래서 다시 가보면 놈들은 늘 잘 자고 있어. 그것 참… 그래도 난 사납고 매서운 동물에게 애착이 가.”
한국 표범의 2세 출산은 자연포육에 성공했다는 의미도 있다. 동물원에서 사는 고양잇과 맹수들은 젖을 물리면서 새끼를 키우는 일이 흔치 않다. 대부분의 동물원에서는 고양잇과 동물의 식성에 맞는 젖 성분을 가루로 가공한 제품을 수입해 포육담당 직원이 어미 대신 새끼에게 젖병을 물려서 키운다.
8월3일, 일반 공개 사흘째를 맞은 아기 표범들은 무더운 날씨 탓인지 활발히 움직이진 않았다. 가끔 입을 벌려 “가르릉~” 소리만 낼 뿐, 늘 어미 곁에 붙어 있다. 날씨가 더우면 늘어지는 건 고양잇과 동물들의 특성 중 하나다. 인접한 우리 안의 흑표범도, 백호(白虎)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작은 덩치의 아기 표범들에게서 기품이 느껴진다. 표범의 특징인 검은 매화무늬도 또렷하다. 놈들은 나무도 곧잘 타서 벌써부터 표범 특유의 날렵함을 뽐낸다. 무럭무럭 자랄수록 잠재된 야성이 점점 본능을 일깨울 것이다. 한국 표범의 점프 능력은 2.5m, 순간속력은 초당 14m나 된다. 평균수명은 23년.
일반 공개 하루 전인 7월31일, 산실에서 다시 우리로 돌아온 어미는 왼쪽 옆 우리에 사는 흑표범과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한껏 으르렁댔다고 한다. 강한 모성 본능 때문일 것이다. 표범의 먹이는 쇠고기와 닭고기. 오전 10시와 오후 2시, 하루 두 번 준다. 엄 씨는 새끼들을 위해 고기를 칼로 다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 표범 2세 출산으로 국내의 표범은 6마리로 늘었다. 이번에 태어난 두 마리를 포함해 서울대공원에 한국 표범 4마리가 있고, 청주동물원에 다른 아종 2마리가 있다. 서울대공원의 바람, 국가적 차원의 경사(慶事)를 일궈낸 주역 중 한 명인 사육사 엄 씨의 바람은 뭘까. 그가 예의 ‘무거운 입’을 애써 열더니 짤막히 답했다.
“‘수고했다’는 한마디면 족해. 그런데 우리 국민은 너무 호랑이만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