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4호 커버스토리 ‘캠퍼스 국제화’는 반드시 필요한 문제제기였다. 대학 안팎에서 누구나 다 알면서 아무도 모르는 척 쉬쉬했던 문제였으니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학 전임 교원 공채에 ‘영어강의 가능자’라는 요건이 비고란이 아닌 필수 조건으로 요구되기 시작했다. 교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도 졸업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영어강의 수강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외국어 연극을 하듯 교수와 학생이 공모한 채 속 빈 강정 같은 수업이 이뤄진다고 말이다.
가장 큰 수혜자여야 할 외국인 학생이 가장 먼저 소외됐다. 국제적 캠퍼스라는 ‘분위기’를 원했지 사실 아무도 캠퍼스 국제화의 내실을 원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주간동아가 지적한 것처럼 정량평가에 치우친 대학 평가가 가장 큰 원인이다. 대학은 지성의 중심이다. 취업 준비 학원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인정한다 해도 우리 사회의 핵심 인력 대부분이 대학교육을 거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학의 문제가 우리 사회문제의 핵심을 함축하는 것이다.
글로벌리즘이 글로컬리즘의 개념으로 바뀐 지 꽤 오래됐다. 글로컬리즘은 세계화를 의미하는 글로벌리즘과 고유한 지역성을 의미하는 로컬리즘의 합성어다. 제대로 된 세계화는 무작정 외국 기준에 우리 것을 맞추는 게 아니라, 세계적인 것을 우리 것으로 토착화하고 로컬과 글로벌을 잘 결합하는 것일 테다. 대학 국제화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 글로벌리즘이 아닌 대학 글로컬리즘이 필요한 시점에 주간동아의 심층취재는 그 필요성을 보여주는 데 충실했다.
가장 큰 수혜자여야 할 외국인 학생이 가장 먼저 소외됐다. 국제적 캠퍼스라는 ‘분위기’를 원했지 사실 아무도 캠퍼스 국제화의 내실을 원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주간동아가 지적한 것처럼 정량평가에 치우친 대학 평가가 가장 큰 원인이다. 대학은 지성의 중심이다. 취업 준비 학원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인정한다 해도 우리 사회의 핵심 인력 대부분이 대학교육을 거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학의 문제가 우리 사회문제의 핵심을 함축하는 것이다.
글로벌리즘이 글로컬리즘의 개념으로 바뀐 지 꽤 오래됐다. 글로컬리즘은 세계화를 의미하는 글로벌리즘과 고유한 지역성을 의미하는 로컬리즘의 합성어다. 제대로 된 세계화는 무작정 외국 기준에 우리 것을 맞추는 게 아니라, 세계적인 것을 우리 것으로 토착화하고 로컬과 글로벌을 잘 결합하는 것일 테다. 대학 국제화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 글로벌리즘이 아닌 대학 글로컬리즘이 필요한 시점에 주간동아의 심층취재는 그 필요성을 보여주는 데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