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노인과 늙은 소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가 극장가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1월15일 전국 7개관에서 ‘조용히’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2주 만에 상영관을 34개로 늘렸다. 부산국제영화제 피프 메세나상(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최근에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선댄스영화제 다큐멘터리 국제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기도 했다. 이 작품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충렬(42) 감독은 “순식간에 이뤄진 일이라 아직 실감이 안 난다”며 환히 웃었다.
‘워낭’은 말이나 소의 귀에서 턱밑까지 늘여 단 방울을 가리키는 단어. 소가 일을 할 때면 워낭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난다. 평생 소를 부려 논밭을 일구며 9남매를 키운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에게 이 소리는 삶의 일부다. 소가 죽음을 앞두고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는 워낭을 떼어내며 “좋은 데로 가그래이~”라는 인사를 건넨다.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워낭과 두 존재의 담담한 이별은 보는 이에게 묵직한 감동을 준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영화를 탄탄하게 이끌어가는 이 감독의 연출력은 오랜 독립PD 생활에서 길러진 것. 그는 대학 졸업 뒤 외주 프로덕션에 입사해 교양, 연예, 코미디, 스포츠 등 각종 장르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독립PD로서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방송사에서 원하는 영상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건 재미없었고 비전향 장기수, 동성애, 무속신앙, 사북탄광 노동자 등 그가 기획하는 아이템은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6개월 동안 밤낮없이 제작한 프로그램이 방송사의 ‘선택’을 받지 못해 버려질 때면 패배감과 모욕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끊임없이 일하는데 빚은 쌓이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 반복됐어요. 나중에는 공황장애까지 생겼죠. 그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 ‘워낭소리’예요. 원래는 이것도 TV 방송용으로 기획했는데 ‘OK’를 못 받았어요. 다행히 촬영 도중 영화 제작자를 만나 독립영화로 새롭게 출발하게 됐죠.”
이 감독이 ‘워낭소리’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건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우울한 경제 상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아이템이 없을까 고민하다 ‘아버지’를 키워드로 잡았다. 전남 영암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는 늘 소와 함께 있었고, 다큐멘터리는 자연스레 ‘소와 노인이 어우러진 삶의 이야기’ 쪽으로 뻗어나갔다. 그때부터 전국을 뒤지며 ‘쇠락한 고향의 모습을 닮은 아버지와 그를 닮은 소’를 찾는 일이 시작됐다. 오랜 헤맴 끝에 ‘워낭소리’의 주인공을 만난 것은 2005년. 한창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이 감독은 독립PD 생활을 접고 2007년까지 햇수로 3년 동안 꼬박 ‘워낭소리’에 매달렸다.
“돈이 없어 힘든 점도 많았어요. 데려온 촬영감독마다 ‘못하겠다’며 등을 돌리는 바람에 송아지 낳는 장면, 외양간 무너지는 장면, 소가 죽는 장면 등 임팩트가 큰 것은 다 놓쳤죠. 하지만 돌아보면 그 덕에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시각적인 효과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감동이 커졌거든요.”
고향에서 여전히 농사일을 하는 그의 아버지(75)도 ‘워낭소리’를 봤다. 영화를 본 뒤 좋다 싫다 평 한마디 없었지만, “고생한 스태프들과 술 한잔 하라”며 현금 30만원을 쥐어줬다고 한다.
“평생 ‘잘하라’고만 하지 ‘잘했다’고는 안 하시는 분이에요. 독립PD 시절 마음고생만 시켜드렸는데, 이 영화로 효도 좀 했죠. 앞으로도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계속하고 싶어요. 일상적이고 내면적인, 소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 관객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이 감독은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워낭소리’를 통해 내 꿈이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워낭소리’로 독립영화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지금, 그는 10년간 한 주제에 천착해온 집요함으로 다음 작품을 고민하고 있다.
‘워낭’은 말이나 소의 귀에서 턱밑까지 늘여 단 방울을 가리키는 단어. 소가 일을 할 때면 워낭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난다. 평생 소를 부려 논밭을 일구며 9남매를 키운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에게 이 소리는 삶의 일부다. 소가 죽음을 앞두고 가쁜 숨을 몰아쉬자 그는 워낭을 떼어내며 “좋은 데로 가그래이~”라는 인사를 건넨다.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워낭과 두 존재의 담담한 이별은 보는 이에게 묵직한 감동을 준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영화를 탄탄하게 이끌어가는 이 감독의 연출력은 오랜 독립PD 생활에서 길러진 것. 그는 대학 졸업 뒤 외주 프로덕션에 입사해 교양, 연예, 코미디, 스포츠 등 각종 장르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독립PD로서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방송사에서 원하는 영상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건 재미없었고 비전향 장기수, 동성애, 무속신앙, 사북탄광 노동자 등 그가 기획하는 아이템은 줄줄이 퇴짜를 맞았다. 6개월 동안 밤낮없이 제작한 프로그램이 방송사의 ‘선택’을 받지 못해 버려질 때면 패배감과 모욕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끊임없이 일하는데 빚은 쌓이고,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 반복됐어요. 나중에는 공황장애까지 생겼죠. 그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 ‘워낭소리’예요. 원래는 이것도 TV 방송용으로 기획했는데 ‘OK’를 못 받았어요. 다행히 촬영 도중 영화 제작자를 만나 독립영화로 새롭게 출발하게 됐죠.”
이 감독이 ‘워낭소리’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건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우울한 경제 상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아이템이 없을까 고민하다 ‘아버지’를 키워드로 잡았다. 전남 영암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는 늘 소와 함께 있었고, 다큐멘터리는 자연스레 ‘소와 노인이 어우러진 삶의 이야기’ 쪽으로 뻗어나갔다. 그때부터 전국을 뒤지며 ‘쇠락한 고향의 모습을 닮은 아버지와 그를 닮은 소’를 찾는 일이 시작됐다. 오랜 헤맴 끝에 ‘워낭소리’의 주인공을 만난 것은 2005년. 한창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이 감독은 독립PD 생활을 접고 2007년까지 햇수로 3년 동안 꼬박 ‘워낭소리’에 매달렸다.
“돈이 없어 힘든 점도 많았어요. 데려온 촬영감독마다 ‘못하겠다’며 등을 돌리는 바람에 송아지 낳는 장면, 외양간 무너지는 장면, 소가 죽는 장면 등 임팩트가 큰 것은 다 놓쳤죠. 하지만 돌아보면 그 덕에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시각적인 효과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감동이 커졌거든요.”
고향에서 여전히 농사일을 하는 그의 아버지(75)도 ‘워낭소리’를 봤다. 영화를 본 뒤 좋다 싫다 평 한마디 없었지만, “고생한 스태프들과 술 한잔 하라”며 현금 30만원을 쥐어줬다고 한다.
“평생 ‘잘하라’고만 하지 ‘잘했다’고는 안 하시는 분이에요. 독립PD 시절 마음고생만 시켜드렸는데, 이 영화로 효도 좀 했죠. 앞으로도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계속하고 싶어요. 일상적이고 내면적인, 소소한 것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 관객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이 감독은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워낭소리’를 통해 내 꿈이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워낭소리’로 독립영화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지금, 그는 10년간 한 주제에 천착해온 집요함으로 다음 작품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