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우다오커우의 한국 식당. 저녁식사 시간인데도 손님이 없다.
1월1일 오후 중국 베이징(北京)시 하이뎬(海淀)구 쉐위엔루(學院路)의 한 한국 식당. 저녁시간이지만 손님은 없고 주인 이삼갑 씨와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김임욱 씨만 100여 석의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예년에는 새해가 되면 유학생끼리 모여 자축했는데 요즘은 아예 한국 유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식당이 자리한 우다오커우(五道口)는 어언문화대학 등 대학교들이 모여 있어 ‘베이징의 대학로’로 불리는 곳. 늘 한국 유학생들로 붐비던 지역이다. 하지만 지난 1월1, 2일 기자가 찾은 우다오커우의 9개 한국 식당 가운데 한 곳을 빼고는 가끔 중국인 손님만 드나들 뿐 한산했다.
“세계적 경제침체에 환율이 2008년 초 대비 65%나 올랐으니 (손님이 없는 게) 당연하죠.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100위안이면 1만3000원 정도 됐는데 요즘은 2만원이에요. 그만큼 유학생 지갑이 얇아졌으니 장사가 되겠어요? 한국 소주 한 병에 30위안을 받다가 최근 18위안으로 내렸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요.”
2008년 1월에는 100만원을 환전할 경우 7700위안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었지만, 9월부터는 5000위안 정도밖에 안 돼 그만큼 한국인의 소비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설명이다. 중국에서도 경기침체가 진행되면서 중국 손님도 많이 줄었다.
“지난해 11월부터 확 줄었어요. 9월부터 190위안대로 오르기 시작하고 그 여파가 두 달 뒤 나타나기 시작한 거죠. 한국 학생 4명이 오면 소주 4병 정도 마시고 1인분에 68위안짜리 생갈비도 곧잘 주문했어요. 지금은 4명이 기껏해야 1, 2병 마셔요. 생갈비요? 그건 중국인만 주문합니다.”
중국인을 상대로 한 음식점도 함께 운영하는 이씨는 한국 식당은 그저 유지만 하고 중국인 상대 식당에 제대로 신경 쓰기로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베이징의 한국인 자영업자들은 ‘베이징올림픽 직격탄’으로 그로기 상태에 몰렸다가 ‘고환율 폭탄’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8월 올림픽이 열리기 전 중국 정부가 비자 연장조건을 까다롭게 하면서 상당수 한국인이 귀국한 데다,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식료품 반입이 중단되면서 물류비가 50% 이상 올랐다는 것. 쯔진청(紫金城)을 중심으로 1환로(環路), 2환로 등 내부순환도로가 있는데, 당시에는 이 길을 통해 베이징으로 진입할 수 없어 5환로 밖으로 직접 나가 지방에서 올라온 각종 양념과 채소류, 생필품을 싣고 와야 했다.
“채소와 양념값은 30~60% 올랐어요. 1kg짜리 식용유가 20위안에서 60위안으로 올랐으니…. 그렇다고 음식 값을 올릴 수 있나요? 환율 때문에 가뜩이나 한국 손님이 없는데.” 김씨의 하소연이다. 당시 베이징에 호구(일종의 주민등록)가 없는 종업원이나 공사 인부들을 베이징에서 대거 몰아내면서 종업원 급여도 30% 이상 올랐다고 한다.
한국인 상대 업소는 업종 바꾸거나 문 닫거나
그렇다고 ‘지구전’을 펼칠 처지도 아니다. 한국인이 베이징에서 대거 빠져나갔지만 들어오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학연수생들이 몰려오는데 올해는 예년에 비해 50% 정도 줄었다는 것이 한국인 자영업자들의 얘기다.
한 중소기업의 베이징 주재원 김성태(44) 씨는 ‘알 만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한국인 집단 거주지역인) 왕징(望京)에서 주재원 모임을 갖는데, 지난달 모임에선 베이징 주재원들이 40% 정도 참석하지 않았더라고요. 환율 때문에 모두 귀국했대요. 저희 회사는 달러나 인민폐(人民幣)로 급여를 주기에 그나마 생활할 만하지만, 원화로 받는 친구들은 못 살죠.”
결국 견디다 못해 두 달 새 우다오커우 지역에서만 한국 식당 서너 곳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한국산 물품을 파는 편의점 세 곳도 장사를 그만뒀다.
칭다오(靑島)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 칭다오시 샹강둥루(香港東路)에서 10년째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황영희 씨는 “매출이 지난해 상반기 대비 60% 정도다. 50%대로 내려가면 식당 운영이 불가능하다”며 “골프 관광객이 급격히 준 데다 한국 기업도 어려워 한국인 손님을 구경하기 어렵다. 돌파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식당들은 파격 할인 등 각종 이벤트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임계점에 와 있다. 우다오커우에서 한국 학생들이 자주 찾는 한 술집은 월~목요일 학생증을 지참하면 술을 반값에 주고 있고, 다른 치킨 전문점은 마리당 80위안 하던 것을 58위안으로 값을 내렸다. 또 다른 주점은 테이블당 치킨 한 마리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이 밖에 ‘2+1’(소주 2병을 마시면 1병 무료), ‘번호표 선물 추첨’ 등 각종 이벤트를 내세우고 있다.
“단골 한국 유학생에게 중국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해요. 주요 고객을 한국 학생에서 중국 학생들로 바꾸려고요. 도무지 환율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모 씨는 한국 식당의 ‘살아남기 위한 출혈 경쟁’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며 혀를 찼다.
택시기사 저우펑(周鳳) 씨는 “예전엔 이곳(우다오커우)에서 승차하는 손님의 20~30%가 한국인이었지만, 올림픽 이후부터 한국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면서 모처럼 한국인 손님을 태웠다며 기자 일행을 반겼다.
다윈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개념을 통해 생물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자연선택이란 자연계에서 생활조건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저절로 사라지는 과정을 요약한 개념 아니던가.
‘왕소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진화를 위한 유학생과 어학연수생들의 생존 몸부림이 치열하다. 물론 다윈은 ‘우연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말했지만.
베이징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준비 중인 김모(27) 씨는 ‘아내와 자식처럼’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담배를 바꿨다. 수년간 한 종류만을 피워왔지만 고환율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부활한 ‘아나바다’ … 변해야 산다
중국 산둥대학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 그들은 “중국 학생처럼 살아야 고환율 파고를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택시족(族)’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자전거족으로 변해가고 있다. 베이징에서 택시 기본요금은 10위안(4km). 이후 km당 2위안이 추가된다. 상하이의 택시 기본요금은 11위안. 베이징의 경우 지하철은 기본요금 2위안, 버스는 기본요금 1위안(교통카드는 0.8위안)이다.
아예 현지 학생화(化) 전략으로 고환율의 위기를 넘기는 학생도 많다.
“처음엔 500㎖에 1.5위안 하는 광천수를 사먹었는데, 요즘은 기숙사에서 제공하는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아 식혀 먹어요. 한 달이면 꽤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죠.”(산둥대학 황성해 씨·27)
“이곳(웨이하이)은 해안도시라 해산물이 싸요. 음식점에 가는 대신 가리비나 전복을 직접 사서 요리해 먹는데, ‘몸보신’한다고 생각해요.”(산둥대학 연요한 씨·25)
여학생들은 한국의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공동구매하기도 한다.
“유학생들이 주로 사입는 겨울 외투는 300~500위안, 바지는 100~200위안, 티셔츠는 50위안 정도 해요. 이 가격이면 아예 한국에서 옷을 공동구매해 물 건너오는 게 싸죠. 한국 제품이 디자인이나 질도 좋잖아요. 배송료 3만원 정도를 내면 한국에서 사입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여학생 기숙사에서 옷을 교환해 입는가 하면,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하죠.”
어학연수생 김화요(23) 씨는 옷뿐 아니라 예전에는 그냥 버리던 책상, 책, 난방기구, 조리기구 등도 인터넷 카페를 통해 팔거나 교환하는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기) 운동이 생활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환율이 급상승하면서 환율 및 환전 수수료 정보 아이템은 ‘즐겨찾기’가 되기도 한다.
“환전 수수료가 싼 은행이나 환율 관련 정보는 최대 관심사입니다. 언제 돈을 찾느냐에 따라 190위안대로 찾을지, 200위안대로 찾을지 다르거든요. 예전엔 신경도 안 썼는데….”
베이징대학 박사과정 김진석(30) 씨는 최근 들어 자동화기기(ATM) 앞에서 망설이는 버릇이 생겼다며 웃었다.
“남친 전화 통화시간 10분에서 2분으로”
유학생들은 ‘100위안=2만원’ 환율이 유지되면서 환율 계산도 빨라져 지갑을 더욱 열 수 없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유학생들의 주된 소비 항목인 ‘식(食)’에 대해 얘기할 때는 한국 식당의 스산한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 3명과 일주일에 100위안씩 모아 식재료를 사서 직접 해먹어요. 한 달 용돈 20만~30만원에 맞춰 살려면 식비는 월 600위안, 휴대전화비 200위안, 용돈 200위안 정도에 맞춰야 하죠. 예전엔 중국 학생들에게 가끔 밥도 사곤 했는데, 요즘은 중국 학생들이 밥을 사줘요.”
베이징과기대학 유학생 김호균(25) 씨의 말이다. 그는 재(在)베이징 유학생 축구클럽 회원 20명 가운데 6명이 최근 ‘고환율을 견디다 못해’ 귀국, 군에 입대했다고 귀띔했다.
“밖에서 밥을 주문하거나 사먹으면 한 끼에 20위안쯤 들어요. 하지만 학교 식당은 5위안(1000원) 정도 하니까 끼니당 3000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죠. 예전에는 하루 한 끼 정도를 한국 식당에서 해결했지만 요즘은 거의 구내식당에서 먹어요. 그러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해먹죠. 한국 식당에서 보쌈은 100위안 정도 하는데, 집에서 친구들과 보쌈을 만들어 먹으면 50위안 정도면 충분하거든요. 한국 돈으로 1만원을 절약하는 셈이죠.”
어학연수생 조모 씨는 “숙소에서 밥을 해먹다 보니 요리사가 다 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요즘 유학생들에게 커피와 네일아트는 ‘아련한 기억’이 됐다며 푸념이다.
“커피 한 잔에 25~30위안이니 우리 돈 5000원이 넘어요. 디지털 파마는 한국 미용실에서 6만원이면 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거의 700위안, 무려 14만원에 이르니 환율을 생각하면 사치예요. 30위안 하는 네일아트도 접었고요.”
고환율은 ‘러브라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산둥대학에 유학 중인 남자친구와 하루 통화시간이 10분에서 2분으로 줄어 아쉬워요.”(베이징과기대학 김은영 씨·21)
“한국에 있는 ‘남친’에게 전화하면 ‘오빠 잘 있지?’가 다예요. 다른 말을 하고 싶어도 서로 사정을 아니까 ‘e메일로 하자’고 해요.”(산둥대학 조소희 씨·22)
● 이 기사의 취재에는 대학생 인턴기자 김정(서강대 중어중문학과 4학년), 김보람(연세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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