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국회의사당 앞에서 신년맞이 퍼레이드를 하는 치어리더들.
어느 나라 스포츠 현장에서나 자주 보게 되는 치어리더는 관객에게 경기 관람의 재미를 더해주는 양념 노릇을 톡톡히 한다. 이제 치어리더 없는 스포츠 경기는 팥 없는 찐빵처럼 뭔가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미식축구나 전미프로농구(NBA) 경기에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미국 치어리딩 문화와 달리, 영국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화려한 치어리더의 율동을 보기 힘들다. 치어리딩 팀이 수백 개 있지만 스포츠 경기의 보조요원이 아니라 일종의 무용단, 또는 체조선수들과 같은 독자적 클럽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치어리딩이 몇몇 인기 종목의 흥행성을 높여주는 ‘조미료’가 아니라 독자적 체육활동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 전국 규모의 경연대회도 자주 열린다. 6세부터 18세까지 어린이와 청소년이 두루 참가하는 경연대회는 최근 영국에서 인기를 끄는 가족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운동 효과 스포츠에 뒤지지 않아
이런 영국에서 최근 치어리딩을 공식 스포츠 종목의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국치어리딩협회를 중심으로 제기된 스포츠화 움직임은 ‘밥그릇 챙기기’ 수준이 아니라 상당한 기술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나타나는 변화로 읽힌다.
영국의 치어리딩 경연대회는 젊은 여성들의 탄력 넘치는 몸매와 폭발적 액션을 상품화한 눈요깃감이 아니다. 출연자들은 주어진 시간(2분30초) 동안 레게, 테크노, 디스코 음악에 맞춰 안무와 공중회전 등의 다양한 묘기를 선보여야 한다. 이를 얼마나 완벽하게 소화했는지에 따라 점수가 매겨진다.
대회는 개인전 및 단체전, 무용 부문과 묘기 부문 등으로 세분화돼 각종 기량을 심사해 체조나 리듬체조 종목에 버금가는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다. 운동 효과나 경기 중 동원되는 근육 부위 등을 따져보더라도 치어리딩은 이들 종목에 뒤지지 않는다.
영국인이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을 찬찬히 살펴보면 치어리딩이 스포츠 종목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테니스와 럭비 그리고 프리미어리그에만 열광하지 않는다. TV에서는 황금시간대에 다트게임이나 스누커(영국식 당구의 일종) 같은 종목의 경기들이 버젓이 방영돼 수백만 시청자들을 끌어모은다. 지난 연말 지상파 TV에서 최고 인기를 끈 프로그램은 다름 아닌 유명 연예인들이 전문 안무가와 짝을 이뤄 볼룸댄스 경연을 펼친 ‘스트릭틀리 컴 댄싱(Strictly Come Dancing)’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다트게임이나 철지난 볼룸댄스 같은 종목이 최고 인기 스포츠, 그리고 시청률 1위 프로그램에 오르는 마당에 치어리딩처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와 고난도 기술을 결합한 현대적 종목이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치어리딩 관련 단체들의 주장이다.
물론 치어리딩의 종주국은 영국이 아닌 미국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예일대 재학시절 치어리더로 활약했다. 그러나 영국의 치어리딩 단체 사람들은 미국에서 발생하는 약물, 폭행사건에 치어리더가 종종 연루돼온 사실을 은근히 부각하면서 영국 치어리딩을 차별화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돈의 논리’에 100% 지배당하는 프로스포츠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체적인 기량과 경쟁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영국 치어리딩이 체력단련과 친선을 중시하는 스포츠 정신에 더욱 충실하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는 것이다.
치어리딩 훈련 중 자주 발생하는 안전사고와 관련해서도 영국은 할 말이 많다. 사실 치어리딩 팀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 너도나도 고난도 기술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나라를 가리지 않는 공통적 문제로 굳어져왔다. 남성 치어리더들은 여성 치어리더들을 공중으로 집어던지고 때로는 빙글빙글 돌리면서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난이도 점수를 얻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영국의 한 TV 방송국이 주최한 치어리딩 대회에 참가한 청소년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치어리더들의 부상이 잦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요판 ‘옵서버’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 고등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부상 사고의 56%가 치어리딩과 관련해 발생했다. 해마다 사망자가 한두 명씩 나올 정도다.
그러나 영국은 치어리딩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지나친 난이도 등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허용하는 최고 난이도인 6등급을 인정하지 않고 5등급까지만 기량으로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경기장 바닥을 단단한 재질로 유지하도록 규정함으로써 바닥을 이용해 튀어오르는 묘기 사용을 금한다. 한마디로 묘기보다는 기본기 위주로 평가함으로써 스포츠의 기본 정신에 충실한 것이다.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영국에서는 어린이들도 ‘안전하게’ 치어리딩을 배운다. 일부 무용학원에 개설된 치어리딩 과정은 세 살짜리 어린이도 등록이 가능하다. 3~5세 아이들은 기본적인 팔 동작과 응원 동작 등을 배우고, 재능이 발견된 아이들에 한해 재주넘기 같은 기술이 허용된다. 기본 원리와 소양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영국식 교육철학은 치어리딩 훈련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치어리딩이 정식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되고 궁극적으로 올림픽 공식종목까지 오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무엇보다도 100년 넘는 치어리딩 역사를 가진 종주국 미국의 태도가 중요하다. 또 이미 국제치어리딩연맹 창설을 주도하는 등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해 전방위적 노력을 기울이는 일본과의 공조 여부도 관건이다.
정식 종목으로의 등극 여부와 관계없이 영국의 치어리딩 열기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보는’ 스포츠가 아닌 ‘즐기는’ 스포츠를 강조하는 영국에서 치어리딩이야 말로 참여와 팀워크를 강조하는 교육 이념에 충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