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예상을 뒤엎는 웃음을 자아내는 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
이야기는 아버지(이규회 분)의 자살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너무 놀라지 마라’라고 적힌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친구의 빈소에 갔다가 집 나간 아내와 맞절을 올리는 황당한 일을 겪고는 화장실 천장에 목을 맨다.
친구에게 빚을 진 아내가 ‘몸으로’ 그 빚을 갚다 아예 그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양복을 차려입은 채 허공에 매달린 아버지의 모습은 기괴한 웃음을 유발하게 된다. 자식들은 애도의 눈물을 흘리지만 시신을 내려놓거나 장례를 치를 생각도 않은 채 일상을 지속하고, 급기야 그 옆에서 변까지 보기에 이르는 것이다. 민망해진 시신이 눈을 뜨고 “나 좀 내려줘”라고 속삭이지만 소용없다.
영화감독인 첫째 아들(김영필 분)은 아내에게 영화 한 편을 다 찍고 나면 아버지의 시신을 ‘처리’하겠다고 한다.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히키코모리’인 둘째 아들(김주완 분)은 고작 한다는 짓이 시신의 눈에서 고름이 흐르지 않도록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는 것이다. 노래방 도우미 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맏며느리(장영남 분)는 시아버지의 시신이 매달려 있는 집으로 남자 손님(김동현 분)을 끌어들이기까지 한다.
대체 이 집안은 왜 이렇게 ‘막 나가는’ 것일까. 이 패륜의 가족사를 담은 전사(前事)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한 겹 한 겹 드러난다. 알고 보면 이들은 서로 ‘피해’와 ‘가해’ 관계로 얽히고설켜 있는데,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깊은 상처를 마주하기 싫은 인물들은 최소한의 ‘의무방어전’을 펼치는데,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방치하는 것이다. 현실을 바꿀 의지도 재간도 없는 이들에게 아버지는 그저 자살했을 ‘뿐이고’, 장례가 미뤄질 동안 시신이 다소 부패할 ‘뿐이다’.
시신이 썩어가고 둘째가 틈만 나면 변을 보는 화장실의 환기통은 고장나 있는데, 이는 비상구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가족들은 아무도 이를 고치려 하지 않으며, 집 안에 들어온 낯선 남자가 환기통을 고쳐준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환영한다.
이처럼 상식과 예상을 뒤엎는 인물들의 언행은 웃음을 자아낸다. 웃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하다. 웃음이 인물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상황 설정은 매우 극단적이지만,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사회적인 고름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듯 ‘응축된 현실’의 느낌을 준다.
비현실 상황, 역설적으로 사회 부조리 고발
아버지의 시신은 방치된 현실 그 자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자식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이 작품이 현실을 철저히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버지의 자살로 시작된 이 극은 며느리의 자살로 끝을 맺는데, 그녀의 자살 역시 남은 자들의 일상에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죽음마저도 비틀고 있는데, “죽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시신의 절망 어린 목소리는 죽음도 별 볼일 없으며,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것은 ‘여전히’ 매달려 있는 아버지 옆에서 ‘여전히’ 변을 보는 둘째의 모습이다. 혼자 남겨진 둘째의 자기 연민이 어린 대사는 극을 잠시 감상적으로 몰고 가면서 전체 분위기와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너무 놀라지 마라’는 한 인물의 시점으로 극을 끌어가거나 촘촘히 짜인 플롯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1차 텍스트에 대한 설명보다 그것을 일그러뜨리고 비트는 재미를 맛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콘셉트다.
극도로 절제된 소품, 허름한 무대, 서울패밀리의 ‘이제는’ 같은 철 지난 유행가는 낙오된 자들의 체념과 절망을 강조한다. 적절한 캐스팅이었으며, 모든 배우의 연기에 각자의 캐릭터가 살아 있다. 2월1일까지, 소극장 산울림, 문의 02-6012-2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