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력교실 1999’의 한 장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한 학교. 학생들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교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학생들은 갱단까지 조직해 학교를 넘어서서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이에 교육당국은 이들을 진압할 교육용 로봇 교사를 만든다. 훈련된 로봇 교사 3명이 학교에 부임하는데, 문제는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이들이 전투용 로봇이라는 것. 교사가 된 전투용 로봇들은 교칙을 위반하는 학생이 있으면 적을 대하듯 마구 죽여버린다. 머릿속에 입력된 ‘폭력 학생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어대로 움직이는 로봇들은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키면 무자비하게 ‘징계’하는 것이다.
아무리 폭력적인 학교가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영화 제작사는 로봇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로 SF물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상황을 조금만 걷어내면 이 초현실 속에 우리 사회의 현실이 겹친다.
요즘 한국의 고등학교들은 이른바 ‘부적응 학생’들을 쫓아내는 데 열심이라고 한다. 학칙을 몇 번 어기면 퇴학이나 자퇴를 시키는데, 죄에 비해 ‘죗값’이 너무 가혹하다. 흡연이 세 번 적발되면 퇴학시키는데, 일부 학교는 두 번 만에 퇴학시키기도 한단다. 학교별 학업성취도 공개를 앞두고 학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느 나라든 ‘문제 학생’에 대한 추방과 격리 시스템은 있다. 그러나 담배와 라이터만 발견돼도 학교를 나가야 한다면 그걸 정상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학력이 그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국 사회에서 학교에서 내쫓긴 아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들은 교육받을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좌절감과 학교와 사회, 교사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된다. 문제아여서 학교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학교에서 쫓겨나 ‘문제아’가 되는 것이다.
‘부적응 학생’ 징계에 열심인 학교
며칠 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학창시절에 나쁜 짓을 하던 사람은 성인이 되어 불안, 초조, 우울증에 시달릴 가능성과 이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어릴 때 나쁜 짓에 가담한 사람은 성장한 뒤 정신건강도 나쁘고 가정생활도 원만하지 않으며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높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사결과를 전하는 뉴스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는데, ‘불량학생’이란 표현이 있었다. 식품에는 불량식품이 있을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 ‘불량’이라는 딱지를 함부로 붙일 수 있다는 발상…. 거기에 한국의 학교, 그리고 한국 사회의 폭력성이 숨어 있다. ‘폭력교실 1999’의 로봇 교사는 영화에서 뛰쳐나와 지금 우리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학칙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징계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불량학생’이라는 낙인을 찍고,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내는 학교와 사회. 진짜 문제는 폭력교실이 아니라 폭력사회, 불량사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