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에서 열린 호주 시인 닐 에머슨의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들.영결식장을 떠나는 유해에 박수를 보내는 케빈 러드 호주 총리.
출생과 결혼, 사망의 순간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법이지만, 한국과 호주 사이에 유독 큰 차이를 보이는 게 있다. 바로 장례식장 풍경이다. 한국의 장례식이 영결의 슬픔을 드러내며 엄숙하게 치러지는 것과 달리, 호주의 그것은 축제마당을 방불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개그 경연대회를 하듯 낄낄거리고 박장대소를 하는 건 다반사다. 흥겨운 음악을 틀어놓고 춤까지 춘다. 1주기 추도식도 비슷한 분위기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그곳에 저는 없답니다. 잠자고 있지 않답니다/ 천 개의 바람으로,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저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답니다….’
한국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알려진 이 시의 원제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로 호주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낭송되는 시다. 작자 미상의 이 시가 애송되는 점에서 알 수 있듯, 호주 사람들은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출발로 여긴다. 그래서 슬픔을 억누르고 축제를 벌인다. 이는 인간 영혼의 불멸과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도 맞닿아 있다. 죽음과 장례절차를 부활을 위한 예비조건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여긴다면 장례식장이 눈물바다라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먼 항해를 떠나는 배의 출정식 같은 시끌벅적한 의식이 됨직하다. 노래 부르고 춤 추면서.
특히 망자의 생애를 추억하는 대목에선 슬펐던 일보다 기뻤던 일이 주로 거론된다. 망자가 감추고 싶어한 단점이나 실수담은 장례식장 최고의 회고 아이템. 그런 일화는 십중팔구 유족이나 가장 친했던 친구들의 입을 통해 폭로된다.
그렇다고 장례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바다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목사나 신부가 집전하는 종교의식은 엄숙하게 치러진다. 유족과 조문객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관 앞에 꽃을 바치는 것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
내가 경험한 ‘즐거운’ 호주 장례식과 추도식을 소개한다.
밤 10시 시작 하드록에 차차차까지
2008년 9월 호주의 중견시인 닐 에머슨의 장례식이 열렸다. ‘호주의 마지막 보헤미안’으로 불린 그의 장례식은 여러 가지로 아주 낭만적(?)이었다. 밤 10시에 시작된 것도 그렇고, 선술집(pub)에서 시끌벅적한 록 음악을 연주한 것도 파격이었다. 나중에 유족들이 와서 “이건 닐이 생전에 원했던 장례식”이라고 설명할 때까지 나를 포함해 조문객 대부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서야 동료 시인들은 “역시 닐 에머슨다운 극적인 퇴장”이라며 술잔을 들었다.
장례식이 열린 선술집은 닐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여러 분야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아지트였다. 그는 호주작가센터, 시인협회, 미술가협회, 시드니 미술대학 등이 모여 있는 시드니의 벨메인 바닷가 선술집 거리를 밤새도록 순례하는 기행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아주 짧은 종교의식을 제외하면 그날의 장례식은 록 콘서트와 댄스파티가 어우러진 영락없는 주말파티였다. 닐이 생전에 즐기던 컨트리 록과 펑크 음악 등이 연주된 장례식 후반에는 닐의 여동생 부부가 나와 그의 장기이던 차차차 춤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흥겨운 분위기가 자정 가까이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닐의 절친한 친구인 모던발레 댄서 리처드 앨런이 나와 초혼(招魂)의 춤을 췄다. 동시에 무대 뒤쪽에서는 닐이 생전에 녹음한 시 낭송이 들려왔다. ‘흙에서 흙으로, 먼지에서 먼지로/ 나는 떠나왔지만 전부 온 것은 아니라네(Ash to ash and dust to dust/ I’ve left but not at all)’로 끝나는 시였다.
1년 전 떠난 고인을 그리며 노래 부르는 친구들.해변가 호텔에서 열린 한 사회사업가의 1주년 추도식에 참석한 이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
2007년 여름, 엔트란스 해변의 한 호텔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아이비 로즈 지아쿠인토의 1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 호텔은 생전에 사회사업가로 활동한 그녀가 여름마다 찾아와 휴가를 즐기던 곳이다. 자동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시드니 북부의 이 호텔로 유족과 친구 50여 명이 찾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 호텔 뒤뜰에 차려진 음식으로 식사를 마친 다음 그녀의 애창곡이던 베트 미들러의 ‘당신의 바람으로 나의 날개는 날고(Wind Beneath My Wings)’가 연주되면서 시작된 추도식은 유족과 친구들의 회고담으로 웃음바다를 이뤘다.
특히 아이비 로즈의 첫 번째 남편인 노인이 나와서 이혼 당시 스토리를 털어놓았을 때는 모두가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으로 세상 떠날 때까지 함께 산 크리스 지아쿠인토가 중간에 나와 결투 흉내를 내는 장면은 추도식의 하이라이트였다. 지금은 팔순의 노인이 된 두 남자는 나중에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훔쳐냈다.
추도식이 끝날 즈음, 아이비 로즈가 벌인 사회사업으로 도움을 받은 10여 명의 사람들이 나와서 촌극을 선보였다. 생전에 경마를 즐긴 그녀가 경마장에서 이리저리 뛰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재연해 큰 박수를 받았다. 비록 1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날 밤만큼은 그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주는 200여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다. 자연히 각 나라 장례 풍습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 스무한 해 동안 호주에 살면서 참석한 장례식들에서 느낀 공통점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 민족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시아계 장례식 말고는 크게 슬퍼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가는데 울긴 왜 울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