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스 로페즈, ‘Sireno en el Rio de la Plata’(플라타 강변의 남자인어), 2002, 100×70
전시가 열리고 있는 ‘Centro de Museos de Buenos Aires’는 매우 고풍스러운 느낌의 아담한 건물이었는데요, 1페소(약 300원)를 내고 전시장에 들어가보니 일반 미술관 건물과는 완전히 다른 건축양식이 눈에 띄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의 전신은 1918년 문을 연 ‘Cerveceria Munich(뮌헨 맥주 양조장)’로, 유서 깊은 독일식 맥주 양조장이자 지금으로 치면 대형 호프집이었다네요. 건물이 자리한 플라타 강 인근의 마데로 항구는 최고의 해변 휴양지로 1940년대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아직도 ‘Cerveceria Munich’ 하면 아르헨티나의 황금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곳은 아르헨티나 국민에겐 잊고 싶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70년대 군부는 독재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을 납치해 플라타 강에 수장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이곳을 퇴폐 유흥지로 낙인찍어 폐쇄해버렸다고 해요. 도시개발 정책으로 지금은 초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지역으로 거듭났지만, 한동안은 일반 사람들이 근처에 가기도 꺼렸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알레한드로 소마니치(Alejandro Somaschini)가 미술관이 아닌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꿈같던 시기’와 ‘잊고 싶은 비극’의 이야기를 동시에 간직한 이곳을 그저 과거에 의존해 복원하기보다는 현대예술로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습니다. ‘이 지역은 과연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어떤 풍경과 의미를 제공하는가’에 대한 응답을 현대 시각예술로 보여주겠다는 의도였죠.
‘현대 뮌헨’ 전시가 열리는 ‘Centro de Museos de Buenos Aires’ 전경.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인들이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가는 라틴 팝(Pop Latino)의 대표주자인 마르코스 로페즈(Marcos Lopez)였습니다. 그는 원래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독학으로 사진작가가 되었는데요, 초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키치적인 도시풍경으로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높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제목은 ‘Sireno en el Rio de la Plata(플라타 강변의 남자인어)’인데요, 그는 인어를 가리키는 스페인어 ‘Sirana’ 대신 남성형 ‘Sireno’를 사용했습니다. 긴 금발에 창백한 얼굴,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의 인어 아가씨 대신 가슴에 털이 숭숭한 근육질의 남자 인어를 등장시킴으로써 서구의 인어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인어는 유혹의 눈빛을 보내는 대신 거의 노려보는 듯합니다. 관음적 시선에 익숙한 관객을 당혹게 하는 것은 물론, 인어에게 희생된 남성들에게 인어는 결코 연약하고 아름답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니, 어쩌면 인어야말로 여성의 이미지를 하나로 고정시킨 끈끈한 ‘남성문화’의 희생양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남자 인어가 앉아 있는 배경도 이상화된 바다 풍경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바위 대신 건물 잔해에 앉아 있는 그의 꼬리 밑에는 도시의 쓰레기더미가 쌓여 있습니다. 현대판 인어가 사는 새로운 서식지의 모습이자, 아르헨티나 현대미술이 기록한 오늘의 플라타 강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