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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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명예 버리고 ‘태껸 사랑 20여년’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10-22 02: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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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명예 버리고 ‘태껸 사랑 20여년’
    김영철씨(58)의 명함은 텅 비어 있다. 이름과 간단한 연락처뿐, 그를 설명해주는 사회적 수식어는 하나도 없다. 별다른 직함이 없는 탓이다. ‘무술에 미친 사람’, 이것이 그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거의 유일한 호칭이다.

    태껸(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에 관심 있는 이라면 ‘광명 어딘가에 고수가 살고 있다’는 소문 정도는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이 바로 김씨다. 무술에 미쳐 광명의 한 야산 기슭에서 홀로 태껸을 닦고 있는 무도인. 김씨의 삶은 옛 이야기에나 등장할 법하게 비현실적이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김씨를 존경한다.

    10월 초 서울 여의도의 한 공원에서 만난 김씨는 간편한 생활 한복 차림으로 먼저 자신을 ‘미치게 만든’ 태껸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사뿐사뿐 흔들흔들 춤의 스텝처럼 부드럽게 땅 위를 스치는 품 밟기, 힘이라고는 도무지 실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손동작….

    무술을 구성하는 것은 보통 직선이다. 내려찍거나, 올려치거나, 뻗어날리거나. 그런데 그는 다르다. 팔도 다리도 펄쩍 뛰는 두 발도, 온통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그 우아한 궤적 앞에서 상대방은 ‘어이구’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시범을 돕기 위해 따라나온 제자의 오른팔을 ‘우아하게’ 비틀어놓은 뒤에야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태껸을 할 때 제 손짓이나 몸짓을 잘 보세요. 온몸이 태극 곡선을 그립니다. 마치 버선코처럼, 경복궁의 추녀 끝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이지요. 음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뻗어나가는 힘, 그게 바로 태껸의 진정한 강함이에요.”



    잘나가던 직장 그만두고 태껸인의 길 선택

    어린 시절부터 당수와 태권도를 비롯해 온갖 무술을 섭렵했다는 김씨는 뒤늦게 배운 태껸이야말로 그동안 목마르게 찾아헤맨 무술의 극치였다고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 태껸 동작을 먼저 선보인 것은, 이 무술의 참 매력을 보아야만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언의 당부인 듯했다.

    사실 현재 김씨의 삶을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태껸을 위해 돈도, 명예도 버렸기 때문이다.

    돈·명예 버리고 ‘태껸 사랑 20여년’

    제자에게 태껸을 가르치고 있는 김영철씨.

    김씨가 처음 운동을 시작한 것은 중학생 시절. 기차를 타도 1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혼자 통학하며, 덩치 큰 급우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방어’를 위해 찾아갔던 당수 도장에서 그는 곧 자신이 운동에 재능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선배들과의 대련에서도 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수 4단을 따고 1968년 입대한 김씨는 무술 실력을 인정받아 태권도 교관으로 발탁된다.

    태권도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김씨의 경력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제대를 하자 마침 세상에서는 일제의 유산인 당수를 없애고, 국기 ‘태권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씨는 태권도에 관한 각종 1기, 1등 기록을 독차지했다. 대한체육회가 주최한 ‘제1기 태권도 지도자 교육’을 1등으로 수료한 뒤 태권도 국내심판·국제심판 자격을 취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도장을 운영하며 정부가 운영하는 ‘코치 아카데미’를 수료해 체육지도자 자격증까지 땄다. 77년 대한항공의 제1기 기내 안전요원 공채에 뽑힌 뒤에는 보안 안전요원 생활을 했다. 해외여행이 극히 어렵던 시절 날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그는 가족의 자랑거리였다. 세상에 거칠 것이 없던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런데 83년 김씨의 인생은 큰 전환을 맞는다.

    돈·명예 버리고 ‘태껸 사랑 20여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지만, 상대방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제압한다.

    “날짜도 잊지 않아요. 83년 4월13일, 기내에서 신문을 뒤적이다가 ‘태껸이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기사를 본 거예요. 무예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그게 최초의 일이고, 지금까지도 태껸이 유일하지요. 워낙 무술에 관심이 많으니까, 이것도 한번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행기에서 내린 길로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신한승 선생을 찾아 충주로 내려갔지요.”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당수처럼 태권도처럼, 태껸도 자신의 인생에 활기를 줄 또 하나의 무술일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날의 만남은 김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다른 무예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태껸’의 매력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태껸 원형 찾고 수련의 나날 “우리 것 보존에 보람”

    비행을 마치면 바로 충주로 내려가 태껸을 배우고, 다시 비행기 타기를 반복하던 그는 급기야 85년 사표를 냈다. 가족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신선생의 건강이 악화된 뒤에는 집에 모셔다가 병구완을 하면서까지 태껸을 배웠다. 하지만 결국 신선생은 곧 숨을 거두었고, 그는 태껸 고수를 찾아헤매는 고행길에 들어갔다.

    “가족들이 제일 놀랐죠. 평범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술에 미쳐 직장도 내팽개치고 전국을 헤매다니니까요. 안사람을 바깥일로 내몰고…. 참 몹쓸 짓이었지만, 태껸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열망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돈·명예 버리고 ‘태껸 사랑 20여년’
    태껸을 하는 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서기를 몇 차례, 그에게 불현듯 어린 시절 서울 을지로3가에서 ‘특이한’ 도장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창 당수에 열중하던 김씨가 ‘태력술’이라는 낯선 이름의 간판을 보고 찾아갔을 때 관장이 “팽이치기할 줄 아느냐. 제기 찰 줄 아느냐. 그게 바로 우리 무술의 원형”이라는 말을 했던 것. ‘온몸의 힘을 뺀 상태에서 유연하게 흐르는 동작이 진정한 무술이라고 말했던 그가 실은 태껸의 고수가 아니었을까’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씨는 전국 방방곡곡 그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술을 그만두고 인천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안학현씨를 만났다. 그의 두 번째 태껸 스승이다.

    “태껸이 우리 전통 무술이라는 건 동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지게에서 짐 부리는 걸 본 적 있나요? (시늉을 내며) 이게 바로 짐 부리는 거야. 온몸의 힘을 한쪽으로 가볍게 떨어내는 것. 이거랑 똑같은 게 태껸 동작에 있어요. 아무리 덩치 큰 상대가 덤벼도 어깨 쪽에서 짐 부리는 동작을 걸면 꼼짝없지요. 팽이치기는 어떻고. 그건 태껸 팔 동작의 기본이에요. 힘을 빼고 툭툭 건드려줄 뿐인데, 팽이가 절대 멈추지 않잖아.”

    김씨는 다듬이질도 예로 들었다. 팔뚝에 힘을 넣은 채로는 도무지 다듬이질을 할 수가 없다. 온몸의 힘을 뺀 채 토닥토닥 방망이가 움직이는 대로 두어야 한다. 방망이의 힘을 받아 그대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태껸 기술이다.

    안씨는 김씨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었다. 태껸의 새로운 경지가 열렸고, 누구나 즐기는 놀이와 노동을 통해 무술의 기본기를 익혔던 선조들의 지혜에 탄복했다.

    “현재 태껸계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동작이 옳다 그르다 하며 다툼도 있는 게 사실이죠. 하지만 중요한 건 태껸 안에는 우리 역사가,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겁니다. 어떤 무술보다도 매력 있고 강하고요. 그걸 알고 나면 태껸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돼요.”

    세상의 잣대로 보면 김씨는 ‘무능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난 20년 동안 그가 한 일은 고문서를 뒤져 태껸의 원형을 찾고, 태껸을 수련하고, 자신이 스승을 찾았듯 물어물어 그를 보러 온 이들에게 태껸을 가르친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씨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사라져가던 우리 무술 태껸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 태껸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것을 해보자. 자신이 생긴다.”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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