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개각’에서 ‘의외의 인사’로 꼽히는 인물은 단연 이태복(李泰馥·51·전 노동일보 발행인)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이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사회적 지명도로만 따지자면 그의 전격 발탁이 정가에서조차 다소 뜻밖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지난 행보를 더듬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80년대 초 이른바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88년 특별사면)받기도 한 이수석은 국내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특히 그가 90년대 후반∼2000년 초의 격변기에 울산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연대파업을 비롯, 철도-전력-금융 등 각 분야 파업위기 때마다 중재에 나서 ‘합리적 조정’을 무난히 해낸 공적은 노동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때문에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이란 양대 고통에 짓눌린 노동계층을 진무할 난제를 안은 정부로선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펼치기 위해 노동계에 신망이 두터운 그를 ‘적임자’로 낙점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신임수석은 3월26일 개각 발표 직후 노동일보 회장실에서 가진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25일 밤에야 갑작스레 ‘얘기’를 전해들어 아직은 말을 아끼고 싶다”면서도 “노동현장의 ‘막후 조정자’ 경험을 살려 복지-노동정책 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국민의 고통과 불신을 해소하는 데 만전을 기하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또 발탁 배경에 대해 “하필 가장 힘든 시기에 어려운 소임을 맡게 된 건 ‘얼굴 없는 중재자’로서의 이력이 대통령을 보좌할 비서관 역할에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복지-노동정책은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항상 눈-귀를 열어 각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한편 결코 적당히 처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소신을 밝혔다. 그러나 의보재정 파탄 위기 등 최근의 민감한 현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피했다.
그의 입각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수석은 “80년대 복역 당시 대전교도소에 김대통령이 면회 온 일이 있다. 이후 ‘정치를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몇 번 받았으나 고사했다”고 회고했다. 그에겐 96년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으로부터 정치입문을 권유받았으나 사상논쟁에 휘말려 무산된 경험도 있다.
이수석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진보 노동운동진영의 대표인사다. 국민대 법대 재학 중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된 그는 이후 용산시장 지게꾼으로 노동현장에 첫발을 디뎠다. 77년 도서출판 ‘광민사’를 설립해 국내 최초의 노동문제입문서 ‘한국노동문제의 구조’를 비롯, ‘노동의 역사’ ‘영국노동운동사’ 등 노동관련서를 잇따라 발간, 노동운동의 이론적 구심을 자처해왔다. 전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고문경관 이근안에게 온갖 고초를 겪은 뒤 7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89년 창간한 주간 노동자신문(99년 노동종합일간지 ‘노동일보’로 전환) 발행인으로, 사회복지법인 ‘인간의 대지’ 대표로서 줄곧 노동일선을 지켜왔다. 그는 개각 직전인 3월23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노동일보 회장직을 물러났다.
그럼에도 그의 시야가 단지 노동운동에만 매몰돼 있진 않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노동전문가일진 몰라도 복지문제엔 생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내가 사회복지학 교수 겸 휴머니스트 아니냐. 소외 이웃과 행복을 나눠 갖는 게 진정한 정치일 것”이라며 미소로 받아넘긴 이수석은 기업-공공복지분야에도 해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그는 올들어 그리스도신학대에서 객원교수(사회복지학부)로 산업복지론을 강의중이다.
어쨌든 이수석 기용으로 DJ정부 후반기 복지-노동정책은 노동계층의 곁으로 한 발짝 진일보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현 정부의 정책기조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온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개척정신’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용해 혁신적인 정책 밑그림을 표출해낼지 주목된다.
하지만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지난 행보를 더듬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80년대 초 이른바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88년 특별사면)받기도 한 이수석은 국내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특히 그가 90년대 후반∼2000년 초의 격변기에 울산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연대파업을 비롯, 철도-전력-금융 등 각 분야 파업위기 때마다 중재에 나서 ‘합리적 조정’을 무난히 해낸 공적은 노동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때문에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이란 양대 고통에 짓눌린 노동계층을 진무할 난제를 안은 정부로선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펼치기 위해 노동계에 신망이 두터운 그를 ‘적임자’로 낙점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신임수석은 3월26일 개각 발표 직후 노동일보 회장실에서 가진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25일 밤에야 갑작스레 ‘얘기’를 전해들어 아직은 말을 아끼고 싶다”면서도 “노동현장의 ‘막후 조정자’ 경험을 살려 복지-노동정책 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국민의 고통과 불신을 해소하는 데 만전을 기하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또 발탁 배경에 대해 “하필 가장 힘든 시기에 어려운 소임을 맡게 된 건 ‘얼굴 없는 중재자’로서의 이력이 대통령을 보좌할 비서관 역할에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복지-노동정책은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항상 눈-귀를 열어 각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한편 결코 적당히 처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소신을 밝혔다. 그러나 의보재정 파탄 위기 등 최근의 민감한 현안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피했다.
그의 입각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연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수석은 “80년대 복역 당시 대전교도소에 김대통령이 면회 온 일이 있다. 이후 ‘정치를 같이 해보자’는 제의를 몇 번 받았으나 고사했다”고 회고했다. 그에겐 96년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으로부터 정치입문을 권유받았으나 사상논쟁에 휘말려 무산된 경험도 있다.
이수석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진보 노동운동진영의 대표인사다. 국민대 법대 재학 중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된 그는 이후 용산시장 지게꾼으로 노동현장에 첫발을 디뎠다. 77년 도서출판 ‘광민사’를 설립해 국내 최초의 노동문제입문서 ‘한국노동문제의 구조’를 비롯, ‘노동의 역사’ ‘영국노동운동사’ 등 노동관련서를 잇따라 발간, 노동운동의 이론적 구심을 자처해왔다. 전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돼 고문경관 이근안에게 온갖 고초를 겪은 뒤 7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89년 창간한 주간 노동자신문(99년 노동종합일간지 ‘노동일보’로 전환) 발행인으로, 사회복지법인 ‘인간의 대지’ 대표로서 줄곧 노동일선을 지켜왔다. 그는 개각 직전인 3월23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노동일보 회장직을 물러났다.
그럼에도 그의 시야가 단지 노동운동에만 매몰돼 있진 않다는 게 주위의 평이다. “노동전문가일진 몰라도 복지문제엔 생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내가 사회복지학 교수 겸 휴머니스트 아니냐. 소외 이웃과 행복을 나눠 갖는 게 진정한 정치일 것”이라며 미소로 받아넘긴 이수석은 기업-공공복지분야에도 해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그는 올들어 그리스도신학대에서 객원교수(사회복지학부)로 산업복지론을 강의중이다.
어쨌든 이수석 기용으로 DJ정부 후반기 복지-노동정책은 노동계층의 곁으로 한 발짝 진일보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현 정부의 정책기조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온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개척정신’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용해 혁신적인 정책 밑그림을 표출해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