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 독일에 도착한 달라이 라마(왼쪽)를 영접하고 있는 롤란트 코흐 헤센 주지사.
롤란트 코흐 헤센 주지사는 도착 당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직접 나와 달라이 라마를 영접했다. 달라이 라마는 같은 날 오후 보쿰에서 정치적 라이벌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 위르겐 뤼트거스(기민련 소속)와 사민당 지역위원장인 하네로레 크라프트를 잇따라 만났다. 또 독일 국영방송인 ARD의 사회자 마이브리트 일너와의 단독 인터뷰도 있었는데, 일너는 이를 위해 보쿰으로 달려와 달라이 라마와 대담한 뒤 바로 베를린의 방송국 스튜디오로 가 티베트 문제에 대한 생방송 토론회를 진행하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2007년 訪獨 때 환대했다 중국과 관계 급랭 경험
요컨대 달라이 라마에 대한 독일인들의 성원과 관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지난 50여 년간 고난의 역정을 견뎌온 달라이 라마로서도 독일인들의 환대는 큰 위로가 된 듯했다. 그러나 독일 연방정부의 각료 정도는 만나야 “독일이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를 지원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지난해에 그를 환대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라틴아메리카 순방 중이었다. 이 때문에 시선은 연방 부총리이자 외무부 장관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에게 모아졌는데, 그는 뜻밖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달라이 라마의 회동 제안을 거절했다. 이는 독일이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슈타인마이어가 달라이 라마를 외면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2007년 가을 뮌스터대학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차 달라이 라마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메르켈 총리는 그를 친히 총리관저에서 영접했다. 이에 격분한 중국 지도부는 독일과의 예정된 장관급 회담을 모두 취소해 양국 관계는 급격히 냉각됐다. 이때 슈타인마이어는 메르켈의 처사를 “사려 깊지 못하다”고 맹비난했다.
사민당 소속인 슈타인마이어는 좌파 실용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2005년부터 외무부 장관의 일을 무난히 수행해 슈뢰더 이후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는 사민당으로서는 차기 대권주자로 내세울 만한 인물이다. 그는 이미 수차례 중국을 회유해 중국과 달라이 라마 사이의 직접 대화를 권유했으며, 달라이 라마의 방독(訪獨) 사흘 전인 5월12일에는 중국 양제츠 외교부장에게서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새로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독일 정부가 달라이 라마를 영접하는 모습을 보여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50년 전에 티베트를 떠나 인도 다람살라에 자리잡은 달라이 라마의 세력을 과연 정통성 있는 합법 망명정부로 인정할 수 있을지, 또 국제사회가 올림픽 보이콧 등의 방법으로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될지를 판단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예컨대 지난 몇 년 동안 오스트리아 미국 캐나다 등은 달라이 라마를 국빈으로 영접한 반면, 이탈리아와 벨기에 바티칸 등은 이를 거부했다.
달라이 라마가 독일에 도착한 5월15일 ‘차이트’지에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의 글이 실렸다. 슈미트는 서독 총리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난 친중파(親中派)다. 이 기고문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티베트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슈미트는 대다수 티베트 주민들은 중국의 국민으로 각종 문명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데, 일부 종교세력이 기득권을 빼앗긴 데 앙심을 품고 소요를 선동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 달라이 라마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슈미트의 견해는 중국 측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분명히 “중국의 내부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물론 대다수 여론은 달라이 라마를 응원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런 와중에 돌발변수가 생겼다. 독일 연방정부의 개발보조부 장관인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이 달라이 라마를 19일 베를린의 어느 호텔에서 만날 계획임이 언론에 알려진 것이다. 연방정부의 각료가, 그것도 어려운 나라의 경제 보조를 주 업무로 하는 부서의 장이 공식적으로 달라이 라마를 만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할 뿐 아니라, 그가 사민당 소속이라는 점 때문에 이 회동은 더 화제가 됐다. 비초렉-초일은 사민당 당론과 슈타인마이어로 대변되는 독일 정부의 외교 노선에 정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민당 지도부는 발칵 뒤집혔다. 사민당 당수인 쿠어트 벡은 “이 회동에 대한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었다”며 불쾌해했지만 비초렉-초일은 자신이 “사민당의 정강을 충실히 실행했을 뿐이며, 해당 행위 비난은 납득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 5월19일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단독 회담에 대해 그는 “매우 유익했다”고 평가했다. 이 자리에서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지진 사태에 대한 상심(傷心)을 표했고, 비초렉-초일은 국제화 시대에 인권이 유린되거나 소수 문화가 말살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집권 연정 사민당 내부에서도 티베트 문제 엇갈린 반응
달라이 라마가 방문한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5월18일 그의 지지자들이 중국의 티베트 탄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달라이 라마를 ‘사람의 탈을 쓴 늑대’라고 비난하던 중국이 문제 해결을 위해 그와 대화하겠다고 나선 것은 분명 진일보다. 사민당은 자신들의 신중한 외교가 거둔 열매라 믿고 있고, 기민련은 국제사회의 거듭된 압력에 중국이 조금 굴복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대다수 독일 국민은 사민당의 처신을 ‘중국 사대주의’로 보며 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좌파 혹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 곧 ‘약자 보호’와 ‘인권 신장’이 어느덧 우파 정당인 기민련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30여 년간의 국권 상실 경험이 있는 한국은 티베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한을 생각해서라도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난처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침묵을 선택한 듯싶다. 이런 선택이 현명한 것인지 비겁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뭐라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훗날 침묵하는 우리 곁에 서줄 친구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