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읍 본산리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
무엇보다 가설물 같은 국도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래서 마지못해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이를테면 구리에서 춘천으로 가는 46번 국도변, 수십 년째 쉬지 않고 아파트며 국도 확장공사가 지속되고 그 양옆으로 급조한 듯한 건물들에 음식점, 가구점, 스포츠용품점, 위생설비점, 청소용역업점 등이 즐비하여, 간신히 평내를 지나 대성리로 접어들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는 길이 된다. 수도권의 제반 국도가 사정이 이러하다. 김포에서 강화에 이르는 48번 국도, 의정부에서 동두천에 이르는 3번 국도, 아 그리고 무엇보다 천안에서 송탄 거쳐 오산, 수원, 안양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는 도처가 공사판이며 곳곳이 가건물의 파노라마다.
진영읍서 자전거 타는 노무현 … 경남의 대표적 관광코스로 변모
오늘의 방문지가 되는 진영. 그곳에 이르는 모든 길도 사정이 흡사하다. 김해에서 한림을 거쳐 진영으로 들어가는 14번 국도는 우리의 현실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의 양옆으로 ‘가구 거리’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대규모 가구 상가마다 짧은 치마의 ‘내레이터 모델’들을 세워둔다. 한림과 진영 사이, 야트막한 고갯마루 이쪽과 저쪽 사이에 양옆으로 수십 개의 가구점이 있고, 그 업소의 입구마다 젊은 내레이터 모델들이 꼭 두 명씩 나란히 서서 하루 종일 춤추며 일종의 ‘호객’을 하는 것이다.
이쪽 지방의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서울을 비롯하여 대도시 어디에서나 빵집이며 호프집, 안경점이며 음식점마다, 심지어 문방구를 개업해도 대행업체가 달려와서 요란한 장식에 시끌벅적한 음악을 틀고, 또 어김없이 내레이터 모델이 입구에 서서 적당히 몸을 흔들면서 홍보용 멘트를 열심히 날리지 않던가. 정말 요지경 세상인 것이다.
그 ‘요란한’ 거리를 지나면 진영이 나온다. 부산과 마산 사이, 혹은 김해와 창원 사이의 소읍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은 이제 이 고을 출신의 전직 대통령 때문에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오가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경남 일원의 대표적인 관광코스로 변하고 있다. 역대 모든 대통령은 그 자신의 정견과 성격과 그 시대의 정서가 뒤엉켜 여느 사람과는 구별되는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다름 아닌 대통령 아닌가. 그러니 이 지역 출신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미 당선되고 재임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에 편입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전직들’과 달리 그가 퇴임 후 귀향하여 이 진영읍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나무를 심거나 하천을 청소하는 등의 행동은 ‘또 하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남의 대처 사람들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는 소읍이었던 곳이 ‘전국구’의 명성을 갖게는 되었지만, 그러나 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진영은 문학평론가 김윤식과 소설가 김원일에 의하여 여느 지역 못지않은 ‘성지순례’의 한 코스가 된 지 오래다.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사가인 김윤식은 ‘책’이라는 이름으로 된 공동묘지의 ‘묘지기’를 자청하여 수십 년을 한국 근대의 정신을 해명하는 데 바쳤다. 그가 한국문학에 바친 애정과 공헌에 대하여 ‘상세히’ 말할 수 없다면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김윤식은 1936년 윤삼월에 진영의 사산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면서 가진 ‘고별 강연 -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에서 그는 “제가 자란 곳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강가 포플러 숲이었지요. 낮이면 포플러 숲의 까마귀와 메뚜기, 뒤뜰 참새를 벗하며 그들의 언어에 친숙했지요”라고 회상한다.
사산리에서 십리 길을 걸어 대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몇 년 아래로 소설가 김원일이 다녔고 또 그 몇 년 후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학교를 나왔다. 그들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진영에서 나고 자란다는 것은 머지않아 부산이나 서울로 떠나갈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소읍의 정경들은, 지금까지도 부산이나 마산, 혹은 김해나 창원 사이의 어떤 갈림길 정도가 되는 것이다.
이곳을 무대로 김원일은 단편 어둠의 혼을 썼고, 이를 내용적으로 확장하여 장편 노을을 적었으며, 또 이 ‘전쟁과 분단’의 치명적인 내용들을 규합하여 대하장편 불의 제전을 썼다. 김원일의 소설에 대하여 ‘지정학적’인 시선을 규합하여 비평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동향 출신 김윤식이다.
김원일 장편소설 ‘노을’ 좌우 대립 상흔 처절한 고백
김윤식은 김원일의 노을을 아주 ‘상세하게’ 읽어냈다. 예컨대 그는 노을에 나오는 철하, 물통걸, 진영 같은 지명에 대해 섬세하게 해명한다. “철하란 ‘鐵下’의 한글 표기다. 진영이라는 소읍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경전남부선(부산-진주)을 두고 그 아래 마을을 지칭했던 것. 그런데 ‘철상’이란 말이 없고 보면 ‘철하’란 그곳을 비하해서 부른 명칭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첫째 작가 자신이고, 그 다음엔 이곳 출신의 독자들인 터”라고 쓴다.
진영에 대해서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뿐이었는데, 이 수리시설과 철도 통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 모여들었던 것. 일제강점기에 이미 읍으로 승격할 만큼 발달한 진영에는 단감 생산의 최적지로 판명되어 일인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이 몰려들었다. (중략) 진영·김해 사람을 빼면 부산 형무소가 텅 빈다는 속설만큼 여기에 모인 주민의 성향을 잘 말해주는 것은 많지 않다. 좌우익 싸움이 유별나게 벌어진 곳”이라고 쓴다.
바로 그 ‘유별난 싸움’을 기록한 것이 김원일 문학의 핵심이다. 농산물이 집약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쟁의의 소지가 다분했고, 그래서 광복 이후 좌우 대립이 격렬했으며 급기야 6·25전쟁 중에는 경남 남부지역에서는 가장 격렬했던 좌우 쟁투가 극렬히 펼쳐졌던바, 그리하여 이 지역 사람들의 가계에는 분단 이후의 남북관계 모두에 핏줄을 나눌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김원일의 부친은 월북하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처가 쪽으로도 이런 일들이 없지 않았다. 장편 노을은 바로 그 상흔에 대한 가장 처절한 고백이 된다.
김원일 소설의 뜨거운 업적에 대하여 2005년 읍내 금병공원에 문학비가 세워졌다. 나는 이 산하 도처에 서 있는 그 많은 기념비며 문학비 중에서 이 김원일문학비만큼 그 자체로 뭉클한 ‘오브제’일 뿐만 아니라, 몸부림치며 소설을 써온 해당 작가의 세계를 그대로 담아낸 작품도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부산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지금은 설치·조각 작업을 두루 하고 있는 정희욱은 “작가 서재 책장에서 대표작품이 떨어져나와 문학비가 세워질 진영 금병공원에 안착하게 한다는 착상으로 이탈리아산 오석의 수입번호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한 면에만 사실적으로 새겼다”고 적은 바 있다. 해질 무렵 금병공원에 서서 김원일문학비를 바라보면 그 거대한 돌 속에서 어둠의 혼과 노을이 불쑥 걸어나올 듯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어둠에 잠든 진영읍을 뒤로하고 김해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면, 국도변의 수많은 가건물들, 내레이터 모델들마저 퇴근하여 쓸쓸해진 고갯마루들 위로 대도시와 소읍들 사이를 횡행하는 수많은 전선이 읍내 곳곳의 야산에 설치된 송전탑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있다. 노을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끝이 난다.
지금 노을진 차창 밖을 내다보는 현구의 눈에 비친 아버지 고향도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