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6일 외신은 일제히 나자프에서 항전해온 시아파 강경 지도자 알 사드르(31)의 메흐디 민병대와 이라크 임시정부가 휴전에 합의했다는 보도를 내놓았다. 이 휴전은 미국과 이라크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은 ‘아야톨라(최고지도자)’ 알 시스타니 세력이 중재했다. 그러나 철수하기로 한 메흐디 민병대 세력이 무장해제 대신 무기 은닉을 택하고 있어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이라크 사태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나자프 사태는 제2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
아랍권 최대 일간지인 ‘알 하야트’ 8월22일자가 내놓은 보도의 요지다. 잘 알려진 대로 나자프 사태는 다수인데도 후세인 시절 소수파인 수니파에 눌려 지내던 시아파가 일으켰다. 미국이 후세인 세력을 제거해주었으면 시아파는 쿠르드족과 더불어 미국을 환대해야 할 텐데 왜 이들은 반대로 나갔는가.
美, 오래 전부터 이란 원전 ‘시비’
중동 문제는 친미-반미의 이분법으로 살펴봐선 안 된다.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신정통치 등으로 표현되는 ‘제3의 요소’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1979년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란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 세력이나, 같은 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에 항전한 무자헤딘 세력이 이런 부류에 해당한다. 미국이 팔레비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호메이니 세력은 반미를 선택했고, 무자헤딘은 반소(反蘇) 저항에 나섰으니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알 사드르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인물로 순교자가 많이 나온 ‘성골’ 성직자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20대 후반에는 반(半)건달로 지냈다. 미국이 이라크전 종식을 선언하고 난 다음인 지난해 8월 알 사드르는 시아파 주도의 이슬람 국가(신정통치국가)를 세우자며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나왔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4월 이라크 군정의 브레머 최고행정장관이 친미적 성향의 시아파 성직자 압델 마지드 알코이를 살해한 용의자로 알 사드르를 지목하면서 그는 일약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당시 시아파는 ‘배가 고팠다’. 후세인 정부 시절 불이익을 받았던 그들은, 과도위원회나 임시정부에서는 자신들의 ‘파이’가 클 거라고 기대했으나, 미국은 후세인 정부 때와 비슷한 비율로 각료직을 배분했다.
이것이 시아파로 하여금 미국에 불만을 품게 하는 요소가 됐는데, 이때 알 사드르가 ‘반미’ 코드를 내세워 불을 지른 것이다. 나자프는 1965년 팔레비 왕정에 쫓긴 호메이니가 몸을 의탁한 시아파의 성도(聖都)다. 알 사드르는 이곳을 시아파 저항의 본거지로 활용했다.
물론 미군은 나자프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화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자프를 파괴하면 이라크의 시아파 국민이 모두 반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빈대(알 사드르)’를 잡으려고 ‘초가 삼간(나자프)’에 불을 놓았다 그 불이 ‘온 마을(이라크)’로 번져 겉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자프를 포위한 채 ‘고사’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 사이 미국은 알 사드르 세력이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이란산을 발견했다. 호메이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나자프에서 이란산 무기까지 발견됐으니 미국은 또 다른 ‘악의 축’ 이란을 건들 명분이 생겼다.
때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이란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부셰르 원전을 건설해왔는데 2006년 10월쯤 이 원전이 가동될 예정이다. 오래 전부터 이란의 핵개발을 의심해온 미국이 이 원전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선 것. 8월19일 미 국무부의 강경파 존 볼턴 차관은 “이란은 영·독·프 3국과 한 회담에서 3년 내에 핵무기를 갖출 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란이 평화 목적으로 핵개발을 해왔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며 치고 나왔다.
온건파인 파월 장관은 이란의 돈줄 죄는 일을 맡았다. 일본은 이란 최대의 아즈대간 유전에 상당한 투자를 할 예정인데, 8월18일 파월이 일본에 이 유전에 대한 투자를 재고하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스라엘은 작은 영토와 인구, 그리고 주변국의 질시에도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해온 나라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의 핵무장을 원치 않는다. 이라크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시라크 원전을 건설하던 1981년, 이스라엘은 전폭기 편대를 보내 원전 건설현장을 파괴해버렸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이란의 원전 건설 의도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7월에는 이란 원전 파괴를 위한 공습 훈련을 마쳤다.
이란은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이 민사작전을 하는 동안 숨죽인 듯 엎드려 있었다. 애써 미국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필요가 없는 데다 이라크의 새 정권에 시아파의 비중이 커지면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자프 사태 등을 계기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맞장’을 뜨고 나왔다.
8월18일 이란 국방장관이 “미군이 이란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면 중동에 주둔해 있는 미군을 선제공격할 수도 있다”고 발표한 것. 이란 혁명수비대 관계자도 “이스라엘이 우리의 핵시설을 공격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핵무기가 숨겨진 곳으로 추정되는) 디모나 발전소를 공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그들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샤하브-3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이란-이라크전 때는 사우디도 불안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부셰르 원전을 공격하면 이란은 이라크 주둔 미군을 공격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미국의 통제를 받는 이라크 임시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해 이란에 맞설 것이므로 ‘알 하야트’지는 제2의 이란-이라크 전쟁 가능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전쟁이 전쟁을 부르는 악순환. 이 악순환은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서도 피어오르려 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1954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무슬림 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나세르 저격에 실패한 뒤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해 숨어 지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대소(對蘇)투쟁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세력이 ‘알 카에다’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체 인구의 75%가 30살 미만인 ‘이상한’ 인구비를 갖고 있다. 젊은이는 넘쳐나는데 일자리가 부족해, 실업률이 무려 15%대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는 350억 달러의 재정흑자를 기록했으나, 이 돈은 대부분 왕족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다처제(多妻制)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평균 자녀수가 30여명에 이르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왕족은 일하지 않아도 호의호식할 수 있으니, 국민의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은 철저한 친미주의를 선택했다.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노력은 대단한데, 대표적인 사례가 81년의 공중조기경보기 도입 결정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경보기 도입을 막기 위해 대미(對美) 로비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승리한 쪽은 ‘오일 머니’를 무기로 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그 후 미국 정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커넥션을 조사하면 다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미 로비는 정평을 받았다.
이러니 똑똑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충실한 사우디아라비아 청년일수록 왕족 타도와 함께 미국 축출을 외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 흔적이 남아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란혁명이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미국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애초 미국은 이라크를 조기에 안정시켜 빠르게 부흥시킨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라크가 빠르게 부흥하면 독재체제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로 민주화 바람이 불어 들어가 두 나라에서도 친미 민주정권이 수립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알 사드르의 등장으로 사태는 오히려 반대로 흘러왔다. 국제정치는 인간의 머리로 만든 계획대로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알 사드르는 진정으로 굴복한 것일까. 이런 점에서 국제정치는 하느님도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생물(生物)’인 것이다.
‘나자프 사태는 제2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
아랍권 최대 일간지인 ‘알 하야트’ 8월22일자가 내놓은 보도의 요지다. 잘 알려진 대로 나자프 사태는 다수인데도 후세인 시절 소수파인 수니파에 눌려 지내던 시아파가 일으켰다. 미국이 후세인 세력을 제거해주었으면 시아파는 쿠르드족과 더불어 미국을 환대해야 할 텐데 왜 이들은 반대로 나갔는가.
美, 오래 전부터 이란 원전 ‘시비’
중동 문제는 친미-반미의 이분법으로 살펴봐선 안 된다.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신정통치 등으로 표현되는 ‘제3의 요소’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1979년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란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 세력이나, 같은 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에 항전한 무자헤딘 세력이 이런 부류에 해당한다. 미국이 팔레비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호메이니 세력은 반미를 선택했고, 무자헤딘은 반소(反蘇) 저항에 나섰으니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알 사드르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인물로 순교자가 많이 나온 ‘성골’ 성직자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20대 후반에는 반(半)건달로 지냈다. 미국이 이라크전 종식을 선언하고 난 다음인 지난해 8월 알 사드르는 시아파 주도의 이슬람 국가(신정통치국가)를 세우자며 무장투쟁을 선언하고 나왔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4월 이라크 군정의 브레머 최고행정장관이 친미적 성향의 시아파 성직자 압델 마지드 알코이를 살해한 용의자로 알 사드르를 지목하면서 그는 일약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당시 시아파는 ‘배가 고팠다’. 후세인 정부 시절 불이익을 받았던 그들은, 과도위원회나 임시정부에서는 자신들의 ‘파이’가 클 거라고 기대했으나, 미국은 후세인 정부 때와 비슷한 비율로 각료직을 배분했다.
이것이 시아파로 하여금 미국에 불만을 품게 하는 요소가 됐는데, 이때 알 사드르가 ‘반미’ 코드를 내세워 불을 지른 것이다. 나자프는 1965년 팔레비 왕정에 쫓긴 호메이니가 몸을 의탁한 시아파의 성도(聖都)다. 알 사드르는 이곳을 시아파 저항의 본거지로 활용했다.
물론 미군은 나자프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화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자프를 파괴하면 이라크의 시아파 국민이 모두 반미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빈대(알 사드르)’를 잡으려고 ‘초가 삼간(나자프)’에 불을 놓았다 그 불이 ‘온 마을(이라크)’로 번져 겉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자프를 포위한 채 ‘고사’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 사이 미국은 알 사드르 세력이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이란산을 발견했다. 호메이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나자프에서 이란산 무기까지 발견됐으니 미국은 또 다른 ‘악의 축’ 이란을 건들 명분이 생겼다.
때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이란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부셰르 원전을 건설해왔는데 2006년 10월쯤 이 원전이 가동될 예정이다. 오래 전부터 이란의 핵개발을 의심해온 미국이 이 원전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선 것. 8월19일 미 국무부의 강경파 존 볼턴 차관은 “이란은 영·독·프 3국과 한 회담에서 3년 내에 핵무기를 갖출 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란이 평화 목적으로 핵개발을 해왔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며 치고 나왔다.
온건파인 파월 장관은 이란의 돈줄 죄는 일을 맡았다. 일본은 이란 최대의 아즈대간 유전에 상당한 투자를 할 예정인데, 8월18일 파월이 일본에 이 유전에 대한 투자를 재고하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스라엘은 작은 영토와 인구, 그리고 주변국의 질시에도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해온 나라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의 핵무장을 원치 않는다. 이라크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시라크 원전을 건설하던 1981년, 이스라엘은 전폭기 편대를 보내 원전 건설현장을 파괴해버렸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이란의 원전 건설 의도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7월에는 이란 원전 파괴를 위한 공습 훈련을 마쳤다.
이란은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이 민사작전을 하는 동안 숨죽인 듯 엎드려 있었다. 애써 미국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필요가 없는 데다 이라크의 새 정권에 시아파의 비중이 커지면 나쁠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자프 사태 등을 계기로 미국과 이스라엘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맞장’을 뜨고 나왔다.
8월18일 이란 국방장관이 “미군이 이란의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면 중동에 주둔해 있는 미군을 선제공격할 수도 있다”고 발표한 것. 이란 혁명수비대 관계자도 “이스라엘이 우리의 핵시설을 공격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핵무기가 숨겨진 곳으로 추정되는) 디모나 발전소를 공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그들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듯 샤하브-3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이란-이라크전 때는 사우디도 불안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부셰르 원전을 공격하면 이란은 이라크 주둔 미군을 공격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미국의 통제를 받는 이라크 임시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해 이란에 맞설 것이므로 ‘알 하야트’지는 제2의 이란-이라크 전쟁 가능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전쟁이 전쟁을 부르는 악순환. 이 악순환은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서도 피어오르려 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1954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무슬림 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나세르 저격에 실패한 뒤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해 숨어 지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대소(對蘇)투쟁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세력이 ‘알 카에다’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체 인구의 75%가 30살 미만인 ‘이상한’ 인구비를 갖고 있다. 젊은이는 넘쳐나는데 일자리가 부족해, 실업률이 무려 15%대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는 350억 달러의 재정흑자를 기록했으나, 이 돈은 대부분 왕족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다처제(多妻制)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평균 자녀수가 30여명에 이르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왕족은 일하지 않아도 호의호식할 수 있으니, 국민의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은 철저한 친미주의를 선택했다.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노력은 대단한데, 대표적인 사례가 81년의 공중조기경보기 도입 결정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경보기 도입을 막기 위해 대미(對美) 로비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승리한 쪽은 ‘오일 머니’를 무기로 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그 후 미국 정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커넥션을 조사하면 다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미 로비는 정평을 받았다.
이러니 똑똑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충실한 사우디아라비아 청년일수록 왕족 타도와 함께 미국 축출을 외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 흔적이 남아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란혁명이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미국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다.
애초 미국은 이라크를 조기에 안정시켜 빠르게 부흥시킨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라크가 빠르게 부흥하면 독재체제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로 민주화 바람이 불어 들어가 두 나라에서도 친미 민주정권이 수립되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알 사드르의 등장으로 사태는 오히려 반대로 흘러왔다. 국제정치는 인간의 머리로 만든 계획대로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알 사드르는 진정으로 굴복한 것일까. 이런 점에서 국제정치는 하느님도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생물(生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