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매표소를 막 지나니 오른편 다리 입구에 조그만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문에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장죽전(長竹田)에 최초로 차를 심었다는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하동 쌍계사 옆에도 차 시배지(始培地)라는 기념 석물이 있어 도대체 어느 곳이 최초의 차 재배지인지 헷갈린다.
오늘은 화엄사 측의 주장을 들어본다. 화엄사의 창건주는 연기조사다. 1979년에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廣佛華嚴經)’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화엄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됐으며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전해져왔는데, 사경의 발문 덕분에 연기는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한동안 인도 승려로 잘못 알려져
1936년에 편찬한 ‘대화엄사사적’을 보면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도의 고승’이란 기록은 틀린 부분이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연기는 의상의 제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사신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최초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막연하게 지리산으로 기록되어 시배지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장죽전에 차 씨를 심었다는 근거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裟事跡略錄)’에 나와 있는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장죽전에 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나그네는 다리를 건너 장죽전을 둘러본다. 정자가 두 채 있고, 대렴이 차를 심었다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화엄사에는 야생 차밭이 장죽전말고도 효대(孝臺) 서남쪽과 구층암 천불전 뒷산에 넓게 퍼져 있다고 한다. 효대란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는 효성스러운 모습의 석물이 조각돼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연기조사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을 준다. 나그네는 효대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나그네도 경험하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이 우려준 차를 이 세상 최고의 차로 알고 마신다. 어머니는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정성을 마시는 것이리라.
이윽고 나그네는 장엄한 각황전을 지나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사사삼층석탑(四獅三層石塔)이 선 효대에 이른다. 국보 제35호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에 앉아서 비구니 스님이 된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지키고 있으며, 머리로는 삼층 석탑을 떠받들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석탑 정면에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해 찻잔을 들고 있는 석물이 있다. 이 석탑을 지키는 탑전(塔殿) 아래에 야생 차밭이 있을 텐데 탑전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할 수 없이 화엄사 법당 뒤편에 있는 구층암으로 가는 산길에 오른다.
구층암에 들러 암주(庵主) 스님을 찾는다. 암주는 명완(明完) 스님인데, 동행한 다우(茶友)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승(茶僧)이라고 귀띔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다루는 손동작이 물 흐르듯 꽃 피듯 자연스럽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소 짓게 하는 스님의 얘기에 문득 앉은 자리가 편안해진다. “이곳 천불전 뒤에도 야생 차밭이 있는데, 400년 넘은 차나무도 있다고 다인들이 이야기합니다.”
스님에게 어떤 차가 좋은 차냐고 묻자, 웃기만 하면서 벽에 걸린 탁본한 그림을 가리킨다. 석굴암에 조각된, 문수보살이 부처에게 한 잔의 차를 올리고 있는 그림이다. 부처에게 차를 올리듯 우려낸 차가 최고라는 뜻이다. 그렇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리는 차가 최고의 차일 것이다. 천년 전,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올린 바로 그 효심의 차가 최고일 터이다.
오늘은 화엄사 측의 주장을 들어본다. 화엄사의 창건주는 연기조사다. 1979년에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廣佛華嚴經)’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화엄사의 창건연대와 창건주가 분명하게 밝혀진 바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됐으며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전해져왔는데, 사경의 발문 덕분에 연기는 황룡사 출신 승려이며 경덕왕(742~765) 때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한동안 인도 승려로 잘못 알려져
1936년에 편찬한 ‘대화엄사사적’을 보면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하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도의 고승’이란 기록은 틀린 부분이고, ‘장죽전에 차를 심었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연기는 의상의 제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 3년(828)에 사신 대렴(大廉)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최초로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막연하게 지리산으로 기록되어 시배지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같다. 장죽전에 차 씨를 심었다는 근거는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道寺舍利袈裟事跡略錄)’에 나와 있는 ‘대렴이 중국에서 가져온 차 종자를 장죽전에 심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연기조사가 무릎 꿇고 어머니에게 차를 올리고 있는 모습의 석물
이윽고 나그네는 장엄한 각황전을 지나 국보 제35호로 지정된 사사삼층석탑(四獅三層石塔)이 선 효대에 이른다. 국보 제35호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사방에 앉아서 비구니 스님이 된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지키고 있으며, 머리로는 삼층 석탑을 떠받들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석탑 정면에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해 찻잔을 들고 있는 석물이 있다. 이 석탑을 지키는 탑전(塔殿) 아래에 야생 차밭이 있을 텐데 탑전의 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할 수 없이 화엄사 법당 뒤편에 있는 구층암으로 가는 산길에 오른다.
구층암에 들러 암주(庵主) 스님을 찾는다. 암주는 명완(明完) 스님인데, 동행한 다우(茶友)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승(茶僧)이라고 귀띔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다루는 손동작이 물 흐르듯 꽃 피듯 자연스럽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소 짓게 하는 스님의 얘기에 문득 앉은 자리가 편안해진다. “이곳 천불전 뒤에도 야생 차밭이 있는데, 400년 넘은 차나무도 있다고 다인들이 이야기합니다.”
스님에게 어떤 차가 좋은 차냐고 묻자, 웃기만 하면서 벽에 걸린 탁본한 그림을 가리킨다. 석굴암에 조각된, 문수보살이 부처에게 한 잔의 차를 올리고 있는 그림이다. 부처에게 차를 올리듯 우려낸 차가 최고라는 뜻이다. 그렇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리는 차가 최고의 차일 것이다. 천년 전,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올린 바로 그 효심의 차가 최고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