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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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때 라켓 잡고 꿈에서도 스매싱

탁구황제 등극한 유승민 … 초등 2학년 때 선수시작, 중학생 때 벌써 성인들과 어깨 나란히

  • 김성규/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kimsk@donga.com 한인수/ 월간 탁구 편집장 hanishan@paran.com

    입력2004-09-03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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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살 때 라켓 잡고   꿈에서도 스매싱

    8월26일 인천공항에 도착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유승민 선수.

    아테네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유승민(22·삼성생명)이 8월26일 인천공항 출구를 통과한 뒤 가장 먼저 맞닥뜨린 장면은 환영 플래카드도, 꽃다발을 든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도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렌즈를 겨눈 수많은 카메라의 ‘벽’이었다.

    사진기자와 방송 카메라맨들은 한눈에도 족히 200명은 돼 보였다. 이들은 게이트 A 출구 주위로 두른 40m가량의 펜스 뒤쪽을 빽빽하게 채우고도 모자라 주변 의자들 위에 올라섰고, 또 그것도 부족해 휴대용 사다리를 놓았다.

    취재진에 둘러싸인 유승민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메달을 딴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난다. 더 열심히 해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해야 했다. 유승민은 대한탁구협회가 내건 금메달 포상금 5000만원, 대한체육회에서 주는 1500만원, 소속사인 삼성생명 측으로부터 5000만원이 넘는 포상금을 받는다. 또 스폰서인 버터플라이사와 맺은 금메달 옵션 계약이 1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신화통신은 ‘아테네 10명의 별’에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유승민을 포함시켰다. 88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유남규 이후 16년 만에 한국은 또 한 명의 탁구 영웅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탁구 황제 유승민이 딱 그렇다. 아테네올림픽에서 국민들의 묵은 체증을 시원하게 뚫어주며 13억 중국인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유승민. 그는 초등학교 이전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탁구신동’이었다.



    그가 6살 때인 1987년 부친 유우형씨는 간염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인천 부평에서 탁구장을 운영했다. 유치원을 다니던 어린 유승민은 그때부터 아버지가 있는 탁구장에서 혼자 라켓을 가지고 놀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아빠, 이렇게 할 수 있어?” 하더니 라켓 면과 모서리를 반복해 돌려가며 공을 튀기더란다. 손님이 없는 낮엔 혼자 공을 튀기면서 놀았고, 오후에 중학생들이 오면 그 학생들과 같이 장난 삼아 탁구를 하며 한나절을 보내곤 하면서 자연스레 라켓과 공을 몸에 익혔던 모양이다.

    중학생 때 국제대회 참관 뒤 세계 제패 야망 싹터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에 대해 그저 ‘탁구장에서 놀며 자랐으니까’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인천 주안에서 탁구장을 운영하던 외삼촌 황기흥씨가 마침 부평에 들렀다가 유승민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수로 키울 것을 적극 권유하고 나섰다. 황씨는 정식 동우회 활동을 거친 아마추어로는 상당한 실력자로, 주안에 있는 자신의 탁구장으로 유승민을 데리고 가 회원들에게 선보이기까지 했다.

    운명이었을까? 외삼촌 탁구장을 다녀온 유승민은 그날 밤부터 탁구 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다 말고 갑자기 탁구 치는 시늉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18대 16, 18대 17’ 하며 잠꼬대까지 하더군요. 그 이후에도 가끔씩 ‘빨리 서브 넣어, 서브 넣으라니까’ 그러더군요. 실력자들을 보고 오더니 자기도 잘 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봐요.”

    외삼촌의 탁구장을 오가며 탁구를 배우던 유승민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인천 도화초등학교에서 정식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1년 정도의 훈련 끝에 3학년 말에 인천 회장기 탁구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꼬마 선수의 의욕이 꺾이는 일이 생겼다. 초등학교 때 불행히도 무릎에 이상이 생겨 동계훈련을 받지 못한 뒤 후유증에 시달렸던 것. 아버지 유씨의 회고다.

    “방학이 끝나고 상태가 좋아져 다시 연습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갑자기 탁구를 하지 않겠다고 그러더군요. 왜 그러나 싶어 코치 선생님을 만나봤더니 동계훈련 전에는 다 이기던 선수들에게 져서 그런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날 저녁 착잡한 심정으로 아들 앞에 탁구 라켓을 가져다놓고 “탁구를 하지 않겠다니 앞으로 필요 없겠지?” 하며 부러뜨려버렸다.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던지 유승민은 다음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잠깐 동안의 ‘방황’을 끝내고 다시 탁구에 집중한 유승민은 그토록 지기 싫어하는 근성으로 곧 동료들을 따라잡았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유승민은 이미 또래들 가운데서는 상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월등한 기량을 과시했다. 내동중학교 2학년 때는 제13회 아시아선수권대회 파견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최종 선발전까지 진출할 정도였다. 거의 모든 언론이 유승민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신동’이라는 칭호를 붙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하긴 중학생의 몸으로 까마득한 실업 선배들을 제치고 자력으로 최종전까지 올랐으니 관심 대상이 될 만했다. 그의 대표선수 선발 여부는 탁구계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위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3차 선발전 직후 몸살과 위경련을 앓아 몸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연습 부족으로 몸이 굳어 있는 상태에서 최종전에 임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5승5패의 반타작 승부로 7위에 머물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 어린 유망주의 재능을 소중히 여긴 대한탁구협회는 그를 대회가 열린 싱가포르에 참관선수로 동행시켰다. 당시 대회를 다녀온 유승민의 소감은 이랬다.

    “선발전 때는 그냥 떨어졌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는데 막상 형들 경기 모습을 보니까 그때 한 게임만 더 이겼더라면 나도 저기서 경기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어요.”

    이중등록 파문으로 1년 넘게 무적 선수 ‘시련’

    비록 싱가포르에서 선수로 뛰지는 못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국제대회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고, 장차 큰 벽으로 가로막게 될 중국 선수들의 경기를 주의 깊게 살필 수 있게 된 것. 세계 1위 공링후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류궈량, 중국의 최강자였던 왕타오….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은 ‘나도 빨리 저 무대에서 우승을 따내고 싶다’는 목표를 처음 가슴에 아로새겼다. 이는 세계대회 결승 진출, 나아가 황금빛 금메달을 목에 거는 미래의 꿈이 선명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8년여. 그동안 유승민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2001년 고교 졸업 직후 실업팀 진출 과정에서 이중등록 파문에 휩싸여 1년 넘게 무적(無籍) 선수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아픔도 경험했고, 고난 끝에 찾아온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팀 선배 이철승 선수와 짝을 이뤄 복식에서 메달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4위에 그치기도 했다. 또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출전한 단식에서는 64강 1회전 탈락이라는 충격을 경험했다.

    물론 좋은 일도 많았다. 부산에서 열린 2002년 아시안게임 복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은 유승민은 이후 각종 오픈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일궈냈다. 특히 지난해 ITTF(국제탁구연맹) 프로투어 그랜드 파이널에서는 세계 1위 왕리친(중국)을 꺾고 4강에 오르기도 했고, 올해는 이집트 오픈과 US오픈 등을 석권하며 세계랭킹을 3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직전 유승민은 삭발로 결의를 다졌다. 그 많은 좌절의 경험은 모두 아테네의 영광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신화의 땅 아테네에서 유승민은 결국 활화산 같은 투지를 불사르며 한국 탁구의 새로운 신화를 썼다. 유승민이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꿔오던 황금빛 메달을 마침내 목에 거는 순간, 고구려사 왜곡 파문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있던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힘겹게 따라 올라가는 좌우의 오성홍기를 통쾌하기 그지없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신동’ 유승민은 그렇게 ‘영웅’으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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