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0

..

흡입력 강한 은유와 상징의 협주곡

무라카미 하루키 ‘1Q84’

  • 입력2009-11-04 17: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흡입력 강한 은유와 상징의 협주곡
    ‘1Q84’는 하루키가 내놓은 또 하나의 논쟁적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작품답게 배경은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시점이다. 출판 전부터 ‘역대 최고 선인세’라는 상업적 이슈로 화제가 되더니, 아니나 다를까 출간 이후 서점가를 강타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필자와 같은 386 세대에게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로 각인된 이 작가는 이후의 작품으로는 그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386 독자들은 하루키라는 이름에서 ‘상실의 시대’를 추억하며 지금껏 애증의 관계를 이어온 셈이다. 하지만 ‘1Q84’는 그동안 그에게 실망하고 그의 이름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밀어내려 했던 옛 독자들을 다시 작품 앞으로 끌어내고 있다.

    아울러 그를 처음 접한 20대들에게는 ‘상실의 시대’가 아닌 ‘1Q84’의 작가로 자리매김할 조짐이 보인다. 하루키는 많은 독자가 호감을 보이는 것과 달리 문단이나 비평가들로부터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현상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순수문학상인 군조신인상과 아쿠타가와상은 ‘대중소설가’라는 이유로 하루키를 밀어내고 말았다.

    그의 작품이 갖는 대중성이 대중적 글쓰기의 영향인지, 아니면 대중에게 잘 수용된 것뿐인지에 대한 논의도 치열하다. ‘나쓰메 소세키 이후 가장 중요한 일본작가’라는 평에서부터 ‘헤밍웨이의 아류’ ‘버터 냄새나는 미국문학 계승자’라는 혹평까지 하루키는 존재 자체가 늘 폭발력을 지녔다.

    필자 또한 하루키에 대한 감정은 복잡하다. ‘상실의 시대’ 이후 그가 몰입해온 세계관은 필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태엽 감는 새’와 ‘해변의 카프카’에서 그랬다. 작가로서 성공에 이른 하루키는 어느새 신화나 공상의 세계를 헤매 다녔고, 필자는 그의 현란한 변신에 제대로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1Q84’는 이런 논란을 어느 정도 잠재울 것으로 보인다. 독자의 이해와 작가의 욕망 사이, 딱 중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학생운동, 신화, 허구 등에 몰입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의 책이 짐짓 심각한 담론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서사적이지 않고 얄팍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다. 하지만 이 책은 그의 전작들과 달리 허구를 절묘하게 은유와 상징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잘 짜인 협주곡 같은 그의 글쓰기는 하루키가 이제 새로운 영역의 문을 열어젖히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은 2개 주제를 각자의 선율로 절묘하게 연주한다. ‘두 개의 달’, 하나는 정상적인 달이지만 다른 하나는 이지러진 달이다.

    아오마메와 덴고, 이 남녀 주인공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후카에리라는 인물의 두 가지 세계가 합주를 하고 때로는 변주를 한다. 마지막에는 이들이 하나가 되어 ‘투티’(tutti·총주)에 이른다. 이야기는 한 편집자가 소설가 지망생인 덴고에게 후카에리의 소설을 고쳐 쓸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덴고는 이 범죄적 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지만, 이유를 말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 저자인 후카에리를 만난다. 최근 하루키의 소설이 보여주는 공통된 작법이 여기서도 하나의 약점으로 드러나는 셈.

    다른 한편에서는 아오마메라는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한다. 살인청부업자라기보다는 이유 있는 살인을 하는 일종의 청소부 역할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이 여인은 아내를 학대하는 남자의 목에 얼음송곳을 깊숙이 찔러 넣는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세계가 2부에서 하나로 만난다. ‘1Q84’에는 30년 전 일본을 뒤흔든 전공투, 옴 진리교와 같은 신흥종교, 여호와의 증인, 리틀피플이라는 결사체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펼쳐진다.

    흡입력 강한 은유와 상징의 협주곡

    <B>박경철</B><BR>의사

    많은 작가가 사회문제를 다룰 때 직접적인 방식을 채택하는 것에 비해 하루키는 이렇게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한다. 이러한 공상적 허구가 거슬리는 부분이 간혹 눈에 띈다. 세계관이 지나치게 비틀리기도 하고, 문장에선 심지어 의미 없는 반복과 흐트러짐까지 엿보인다. 어쨌든 하루키는 이 작품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해변의 카프카’가 미국에서 열렬한 반응을 얻었지만 국내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필자에게도 실망을 안겨줬다면, ‘1Q84’ 이후 하루키는 필자에게 또다시 강한 흡인력으로 새로운 기대를 안겨주는 작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다시 부는 하루키 바람이 이유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