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북구 동림주공아파트 1단지와 2단지 사이에 세워진 철제 담장. 애초 이 아파트는 임대와 분양아파트 간 ‘담장 없는 마을’을 표방했지만 2단지 분양아파트 주민들이 사유지 재산권 행사를 이유로 221m의 담장을 설치했다.
“죄송해요. 우리 아이 때문에….”
“괜찮아요.”
아이들은 다시 뛰어놀고, 안면을 튼 엄마들은 벤치에서 육아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잠시 후 손자와 나온 할머니도 동참했다. 그들은 최근 개장한 ‘북서울 꿈의 숲’(강북구 번동)에 함께 놀러 가자는 ‘맹세’를 하고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30분쯤 지났을까.
“몇 동 사세요?”
“이 아파트 근처에 살아요.”
“….”
한동안 아무 말도 없더니 ‘아파트에 사는’ 엄마 A씨가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근처에 사는’ 엄마 B씨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지켜보던 할머니가 한마디 했다.
“저렇다니까. 내가 여기 아들네에 온 지 한 달 됐는데, 나이가 많든 적든 엄마들은 꼭 어디 사느냐고 묻더라고. 임대아파트나 평수 작은 데 살면 잘 어울리지도 않아. 오죽하면 아이들도 ‘너, 몇 동 살아? 너희 집이야, 전세야?’ 하고는 서로 비슷하면 친구가 되더라고. 기가 차서 원.”
아파트는 ‘개폐식 삶’의 선택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현관문을 경계로 필요하면 세상과 절연해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지천으로 깔린 이웃 속으로 나올 수 있다. ‘이웃사촌’이라는 존재가 꼭 필요하거나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에서, 딴에는 아파트가 현대인의 심성에 부응하는 주거공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 A씨는 조선시대처럼 반촌(班村)과 민촌(民村)의 엄격한 공간 구분을 원했을지 모른다.
‘아파트 평수=지위’이고 지위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면, 크고 작은 평수의 아파트가 공존하는 ‘단지 내 혼재 방식’은 마뜩지 않을 일이다. 도시화의 진전에 따른 공동체 붕괴현상을 아파트라는 주거양식으로 치유할 수도 있지만, 이처럼 예상치 못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현실이다. 아파트 단지라는 ‘앞마당’을 공유하면서 공동생활을 하는 사회집단, ‘아파트 공동체’의 이면을 들여다보았다.
‘임대와 분양 사이’엔 철제 담장
광주 북구 동림주공아파트는 1단지와 2단지 사이에 철제 담장이 세워져 있다. 이 ‘어색한’ 담은 임대아파트인 1단지와의 차별화를 위해 분양아파트인 2단지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설치한 것. 애초 동림주공아파트는 임대와 분양 아파트의 ‘공동체’를 표방하며 단지 간 ‘담장 없는 마을’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초 2단지 분양아파트 주민들이 ‘사유지에 대한 재산권 행사’를 내세워 단지 경계를 지으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철제 담장을 친 명분은 ‘사유지 보호’였지만, 이면에는 ‘분양아파트에 산다’는 과시욕과 ‘임대아파트와는 다르다’는 차별이 있다는 게 현지 주민들의 말이다. 현재 철제 담장의 길이는 221m. 그나마 구청의 철거명령으로 지난해 말 어린이공원 보행통로 쪽에 설치된 담 40m가 철거됐다. 그리고 주공 측에서 올해 3월 40m 철거구간에 보행자 통로를 설치함으로써 단지 간 분쟁은 일단락됐지만 1단지와 2단지 주민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1단지 임차인 대표회 오재헌 대책위원장은 “1단지 주민들은 남은 221m 철제 담장도 불법이라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지만, 2단지 주민들과 또다시 싸움을 일으킬 수 있어 마음을 추스른 상태”라며 “하지만 애초 ‘담장 없는 아파트’는 이미 빛이 바랬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울시내 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친구가 달라진다.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앞두면 아파트 입주민 간의 갈등은 ‘통과의례’라 할 만큼 빈번하게 빚어진다. 서울의 ‘대표 아파트’로 33년간 명성을 날린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입주민 동대표 6명은 최근 경찰 조사를 받았다.
동대표 회장 신모 씨가 명예훼손 등으로 이들을 고소한 것. 지난 5월 재건축설립추진위 문제를 놓고 6명을 포함한 상당수 주민이 회의를 했는데 이를 신 회장 측이 몰래 녹음해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지난 6월2일 긴급 주민회의에서는 신 회장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반대 측 주민들이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 동별 대표자의 임기 2년(연임 가능) 조항을 4년으로 늘리고 임원 임기도 1차 중임 제한을 삭제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주민투표를 하면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며 반발한 것. 일련번호와 간인(間印·사잇도장)이 없는 투표용지가 나돌았고 한 가구에서 2표가 나왔다는 주민들의 반발로 결국 원상회복됐지만 주민 간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2010년 2월 임기가 끝나는 현 회장이 규약을 바꿔 장기집권하려고 한다. 재건축 때까지 해먹으려는 불순한 의도다”라는 의혹 제기에 “불법투표였다면 선거 책임자를 처벌해야지, 회장에게 왜 시비냐”는 반박과 ‘이놈’ ‘저놈’ 막말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가장 큰 재건축 단지인 서울 송파구 가락시영아파트의 경우 2008년 4월 재건축 사업승인을 받았지만, 조합과 비상대책위원회 사이의 주민갈등으로 사업 진행이 불투명해진 상태다.
가락시영아파트 주민들은 2000년대 초부터 재건축 사업을 추진했으며 모두 7200가구의 아파트를 짓는 것으로 합의한 뒤 조합 설립을 마쳤다. 그러나 서울시가 임대주택 1000가구를 포함, 아파트 8100가구를 짓는 것으로 재건축 방식을 결정하면서 기존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이 과정에서 아파트 평형과 추가 분담금 문제로 주민 간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찬성 측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지난 9월30일 서울고등법원은 반대 측인 비상대책위원회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가락시영아파트 재건축 사업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이 같은 갈등은 결국 아파트 가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락시영아파트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소송 여파로 가격이 떨어져 42.98㎡ 아파트가 급매물로 5억4000만원까지 나왔다. 한 달 전에 비해서도 4000만원가량 떨어진 가격”이라고 전했다. 재개발도 주민갈등으로 개발이 지연되긴 마찬가지.
용산국제업무지구의 경우 개발주체와 아파트 주민 간, 그리고 아파트 주민끼리의 입장차가 겹치며 사업 추진이 지연되고 있다. 용산국제업무지구는 서부이촌동 일대와 철도정비창 부지를 합한 56만6000㎡(약 17만평)를 재개발하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개발 사업. 그러나 서부이촌동 일부 아파트단지 주민들의 반대로 2007년 8월 개발계획이 확정된 이후 최근까지 사업진행이 표류하고 있다. 현재 개발을 반대하는 곳은 서부이촌동 대림아파트(683가구), 성원아파트(340가구) 등.
이들은 수용 방식이냐, 환지 방식이냐의 개발방식에 대한 입장차로 서울시와 갈등을 빚고 있으며 세부 개발계획안을 놓고도 주민끼리 의견이 나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일부 주민의 반대가 있다 해도 서부이촌동 전체적으로는 주민 50% 이상이 개발안에 동의해 법적으로는 사업 추진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일부 아파트단지 주민들이 계속 반대한다면 국제업무지구의 통합개발은 쉽지 않다” 고 말했다.
층간 소음이 살인 불렀다
지난 6월2일 수원지방법원 형사3부는 경기도 수원시 한 아파트 입주민 A씨에게 3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A씨의 죄목은 재물손괴죄. A씨는 2008년 3월경 층간 소음 문제로 자주 다퉈오던 아래층 입주민 B씨의 차량을 일부러 긁어 크게 흠집을 냈다. 사건 전날 소음 문제로 위층 A씨와 아래층 B씨가 욕설을 하며 다퉜고 집안싸움으로까지 악화됐다. 이에 분이 풀리지 않은 A씨는 결국 ‘재물 손괴’를 했고, 그의 행동은 아파트주차장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의 불화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환경부 산하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위원회가 설립된 1991년 7월 이후 2009년 8월 말까지 처리된 환경분쟁 2166건 중 소음·진동으로 인한 것이 1856건(86%)에 달했다. 지난 5월 경남 진주에서는 아파트 소음 문제가 결국 살인을 불렀다. 진주시 가좌동의 아파트에 사는 20대 후반 김모 씨가 평소 소음 문제로 다퉈온 옆집 70대 할머니 이모 씨를 목 졸라 살해한 것.
피의자 김씨의 경찰진술에 따르면 “옆집 할머니가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불을 지르려고 양초를 들고 들어갔다가 부엌에서 일하던 이씨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살해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파트 소음분쟁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와 청소기, 악기 소리 등이 주원인이다. 서울 YMCA 시민중계실 김혜리 간사는 “소음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주민 간 소통을 통해 좀더 여유 있고 너그럽게 풀어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적절한 소음규정, 소음을 줄이려는 건설사의 성실시공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집단 민원에 학교도 사라져
폐교 위기에 몰렸다가 학교 이름을 바꾸고 나서야 명맥을 유지하게 된 동호정보공업고교(현 서울방송고) 사례는 아파트 집단이기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1991년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개교한 동호공고는 그간 별탈 없이 운영되다 2000년대 초 인근 남산타운아파트의 재개발이 끝나면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됐다. 원래 2000가구 이상 아파트가 지어지면 초등학교를 짓기 위한 학교용지 분담금을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5150가구가 지어진 남산타운아파트의 경우 최소 2곳의 초등학교가 분담금을 통해 설립됐어야 했다. 하지만 남산타운주민조합 측은 분담금을 내지 않으려고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2000가구 미만(각 1700가구씩 3구역)으로 구획을 나눠 분담금 부담요건을 피해간 것. 덕분에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입주를 하고 보니 초등학교가 없어 아이들이 건넛마을 초등학교로 30분 넘게 통학해야 했다.
자가당착에 빠진 주민들은 결국 아파트단지 앞에 자리잡은 동호공고 학생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주변 슬럼화, 집값 하락 등을 이유로 동호공고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초등학교를 세워달라고 요구한 것. 여기에는 ‘공업고등학교=혐오시설(?)’이라는 사회적 편견이 깔려 있었다. 날벼락을 맞게 된 학교 측은 저항도 해봤으나 밀려드는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이전 부지를 물색하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용산구, 강서구 일대를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예정부지 주민들도 동호공고의 이전을 반대했다. 동호공고 측은 결국 2008년 2월 ‘서울방송고등학교’로 학교 특성과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학교 부지의 일부를 초등학교 부지로 내주기로 합의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아파트 주민들의 집단민원으로 폐교가 결정된 학교도 있다. 1998년 9월, 53억원을 들여 개교한 보덕초교(대전 유성구)는 내년 2월28일부로 폐교가 결정됐다.
관할 교육청은 학교 인근 택지개발 사업에 따른 교육 수요를 맞춘다는 명목으로 2005년 9월 보덕초교와 불과 1km 남짓 떨어진 곳에 두리초교를 개교했다. 그런데 아파트 학부모들이 단독주택지에 있는 보덕초교보다 택지개발지구 내의 두리초교를 선호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원래는 보덕초교로 배정받아야 할 인근 800여 가구 아파트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두리초교로 보내달라며 교육청에 요구했고, ‘두리초교로 보내주지 않으면 아이들을 등교시키지 않겠다’는 민원까지 제기했다. 관할 교육청은 여론에 떠밀려 결국 통학구역을 조정해줬고, 이로 인해 개교 당시 37개 학급이던 보덕초교는 현재 10학급으로 줄었다. 반면 두리초교는 50학급에 이르는 과밀학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