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40층대에 사는 고등학생 김동현(가명·18) 군은 언젠가부터 창문으로 아파트 아래를 보는 게 무서워졌다. 내려다볼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누군가가 뒷머리를 당기는 듯했다.
처음엔 ‘고층에 적응이 덜 된 탓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증세는 1년 넘게 지속됐다. 덩달아 이상한 습관도 생겼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몸이 창가로 다가가는 것이다. 때로는 ‘이 건물이 무너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 증세도 나타났다.
이 사실을 안 김군 부모는 아들의 방과 거실 창문을 연예인 화보와 그림 등으로 가려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악화돼 화보와 그림 사이의 작은 틈을 통해 건물 아래를 내려다봐야 직성이 풀리게 된 것. 김군 부모는 아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할지, 아니면 낮은 층이나 다른 단독주택으로 이사 갈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요즘 초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거주자가 종종 발견된다. 심리적 동요와 신체적 이상 징후를 함께 느끼기도 하고 체력과 폐 기능 저하, 호흡기질환, 알레르기 증상 등 신체적 이상 징후만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초고층에 거주하는 것과 건강 사이엔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영국, 독일, 미국 등 선진국에서 활발히 진행돼왔다. 초기 연구에서 대다수 연구자는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층주택이 일반주택보다 승강기 등에 의한 바이러스 침입과 외벽의 공기 대류에 의한 병원균 침입 가능성이 높고, 심리적 스트레스의 병인(病因)도 될 수 있다는 설을 제시했다.
이유 모를 불안에 시달리는 거주자 종종 발견
1980년대 이후엔 고층 거주자들이 저층이나 중층 거주자들보다 알레르기나 기관지질환, 폐 기능 저하, 기초체력 하강 증상을 많이 보인다는 연구보고서가 이따금 발표됐다.
일본에선 ‘고층 집합주택 거주’라는 요인이 임신과 출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임상관찰 결과가 발표돼 이슈가 되기도 했다(나중에 이 연구자는 ‘고층에서의 생활이 직접 모체에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외출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임신부에게 흡연과 음주를 유발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결론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 국내에서도 고층 아파트가 공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이와 관련한 연구와 논의가 이뤄졌다.
해외 연구 사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국내의 독특한 건물 시스템이나 거주자 생활양식 차이 등의 변인을 고려해 고층 아파트와 거주자들의 건강과의 상관관계를 검증할 필요성이 학계에서 제기된 것. 1991년과 92년 ‘초고층 아파트 주거자의 주거환경 의식에 관한 연구’(신성영·조대성) 논문을 시작으로 93년 ‘초고층 아파트의 의학적 병리현상에 관한 연구’(박철수·이유미·김홍규), 96년 ‘초고층 아파트 거주자의 주거환경 스트레스와 건강’(심순회·강순주) 등이 잇따라 발표돼 주목을 끌었다. 2000년 이후에도 10여 편의 관련 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그간의 국내 연구를 통해 제시된 심리적, 신체적 병리현상은 이미 해외에서 보고된 현상들이 국내 거주자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거주자들은 있지만, 증세가 고층 조건 때문이라고 명확히 규명하는 작업이 쉽지 않은 탓이다. 특히 그동안 국내 연구는 아동이나 유아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집중됐다. 이를 통해 제기된 병리현상은 △폐 기능 저하 △호흡기질환 △알레르기 증상 △고소감각 마비로 인한 사고 △야뇨증 등이다.
다양한 문제 ‘조망권’에 묻혔나
한남대 강인호 교수(건축학)와 전북대 최병숙 교수(주거환경학)는 2000년 ‘주거고층화와 아동의 신체적 병리현상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고층 아파트 거주와 아동의 신체적 질병 발생이 관련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거주 층수와 질병 발생률의 선형적 관계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강인호 교수는 또 2006년 주택도시연구원 백혜선 책임연구원과 함께 경기도 한 초고층 아파트단지 부근 유치원생 부모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초고층 아파트 거주 아동의 건강성 조사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거주 층수에 따른 전반적인 신체적 건강 상태의 특징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거주 층수가 높아짐에 따라 아동의 안전성 확보나 사회성 발달에 대한 부모들의 불안감이 커진다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 최근 고인이 된 경북대 하재명 전 교수(건축학)는 영진전문대 김남길 교수(실내건축디자인)와 “지면과의 격리감이 초고층 아파트 입주 초 감정변화와 함께 혈압상승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연구에선 혈압이 층 높이에 따라 증가하고, 특히 18층 이상에서 가장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 초고층 아파트와 신체건강의 상관관계에서 일관된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결론이다. ‘주간동아’도 지난해 대표적인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인 타워팰리스 1~3차 거주자의 2004~06년 진료기록명세표 11만9855건을 단독 입수해 강인호 교수팀과 분석했지만 초고층 아파트와 건강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입증하진 못했다. 6~15층, 16~25층에서 질병 발생 비율이 평균보다 약간 높았고, 6층 이상에서 호흡기 발생 비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으나 통계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호흡기질환, 눈, 피부 및 피하조직 질환자들을 대상으로 거주층과의 연관성도 파악했으나 이 또한 통계적 유의성은 찾기 어려웠다. 강인호 교수는 “유전적 특성이나 생활패턴이 아닌 주거환경은 질병 발생에서 작은 요소인 데다, 실제 거주자들에 대한 심층면접 등이 생략됐기 때문에 뚜렷한 결론을 도출해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국내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사 주기가 짧아 신체가 환경 조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짚어내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박철수 교수(건축학)도 “고층 아파트에 사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 됐다는 상징처럼 여겨지면서 병리 현상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강순주 교수(소비자주거학) 또한 “거주자들이 집값이 떨어질까 봐 쉬쉬하는 바람에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측면도 있다”며 연구조사의 한계를 털어놨다. 그렇다면 초고층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신체 이상이나 고통을 호소하는 거주자들의 주장을 근거 없는 하소연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전문가들은 “고층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면서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강순주 교수는 “고층 거주로 인한 고소공포증이나 귀울림 현상, 엘리베이터 스트레스, 유아들의 자립 저하 및 사회생활장애 등은 분명 적잖은 주거환경 스트레스로 작용해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며 “초고층 아파트가 계속 건설되는 만큼 관련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인호 교수도 “환경적 영향력을 갖는 호흡기 비염, 알레르기성 피부질환, 천식 등의 질병에서 주거 고층화의 영향 요인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철수 교수는 “민간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확산된 ‘조망’ ‘전망’ ‘뷰(View)’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경향이 초고층 아파트의 다양한 잠재적 문제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풍수지리학자인 우석대 김두규 교수(교양학부)는 “고소공포증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거나 강물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청소년은 풍수적으로 고층 아파트에 살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처음엔 ‘고층에 적응이 덜 된 탓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증세는 1년 넘게 지속됐다. 덩달아 이상한 습관도 생겼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몸이 창가로 다가가는 것이다. 때로는 ‘이 건물이 무너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 증세도 나타났다.
이 사실을 안 김군 부모는 아들의 방과 거실 창문을 연예인 화보와 그림 등으로 가려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악화돼 화보와 그림 사이의 작은 틈을 통해 건물 아래를 내려다봐야 직성이 풀리게 된 것. 김군 부모는 아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할지, 아니면 낮은 층이나 다른 단독주택으로 이사 갈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요즘 초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심리적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거주자가 종종 발견된다. 심리적 동요와 신체적 이상 징후를 함께 느끼기도 하고 체력과 폐 기능 저하, 호흡기질환, 알레르기 증상 등 신체적 이상 징후만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초고층에 거주하는 것과 건강 사이엔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영국, 독일, 미국 등 선진국에서 활발히 진행돼왔다. 초기 연구에서 대다수 연구자는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층주택이 일반주택보다 승강기 등에 의한 바이러스 침입과 외벽의 공기 대류에 의한 병원균 침입 가능성이 높고, 심리적 스트레스의 병인(病因)도 될 수 있다는 설을 제시했다.
이유 모를 불안에 시달리는 거주자 종종 발견
1980년대 이후엔 고층 거주자들이 저층이나 중층 거주자들보다 알레르기나 기관지질환, 폐 기능 저하, 기초체력 하강 증상을 많이 보인다는 연구보고서가 이따금 발표됐다.
일본에선 ‘고층 집합주택 거주’라는 요인이 임신과 출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임상관찰 결과가 발표돼 이슈가 되기도 했다(나중에 이 연구자는 ‘고층에서의 생활이 직접 모체에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외출 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임신부에게 흡연과 음주를 유발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결론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 국내에서도 고층 아파트가 공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부터 이와 관련한 연구와 논의가 이뤄졌다.
해외 연구 사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국내의 독특한 건물 시스템이나 거주자 생활양식 차이 등의 변인을 고려해 고층 아파트와 거주자들의 건강과의 상관관계를 검증할 필요성이 학계에서 제기된 것. 1991년과 92년 ‘초고층 아파트 주거자의 주거환경 의식에 관한 연구’(신성영·조대성) 논문을 시작으로 93년 ‘초고층 아파트의 의학적 병리현상에 관한 연구’(박철수·이유미·김홍규), 96년 ‘초고층 아파트 거주자의 주거환경 스트레스와 건강’(심순회·강순주) 등이 잇따라 발표돼 주목을 끌었다. 2000년 이후에도 10여 편의 관련 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그간의 국내 연구를 통해 제시된 심리적, 신체적 병리현상은 이미 해외에서 보고된 현상들이 국내 거주자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거주자들은 있지만, 증세가 고층 조건 때문이라고 명확히 규명하는 작업이 쉽지 않은 탓이다. 특히 그동안 국내 연구는 아동이나 유아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집중됐다. 이를 통해 제기된 병리현상은 △폐 기능 저하 △호흡기질환 △알레르기 증상 △고소감각 마비로 인한 사고 △야뇨증 등이다.
다양한 문제 ‘조망권’에 묻혔나
국내 연구에선 거주 층수가 높아질수록 아동의 건강에 대한 부모들의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강인호 교수는 또 2006년 주택도시연구원 백혜선 책임연구원과 함께 경기도 한 초고층 아파트단지 부근 유치원생 부모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토대로 ‘초고층 아파트 거주 아동의 건강성 조사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거주 층수에 따른 전반적인 신체적 건강 상태의 특징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거주 층수가 높아짐에 따라 아동의 안전성 확보나 사회성 발달에 대한 부모들의 불안감이 커진다는 결과를 얻었다.
한편 최근 고인이 된 경북대 하재명 전 교수(건축학)는 영진전문대 김남길 교수(실내건축디자인)와 “지면과의 격리감이 초고층 아파트 입주 초 감정변화와 함께 혈압상승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 연구에선 혈압이 층 높이에 따라 증가하고, 특히 18층 이상에서 가장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 초고층 아파트와 신체건강의 상관관계에서 일관된 결과를 얻기는 어렵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결론이다. ‘주간동아’도 지난해 대표적인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인 타워팰리스 1~3차 거주자의 2004~06년 진료기록명세표 11만9855건을 단독 입수해 강인호 교수팀과 분석했지만 초고층 아파트와 건강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입증하진 못했다. 6~15층, 16~25층에서 질병 발생 비율이 평균보다 약간 높았고, 6층 이상에서 호흡기 발생 비율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으나 통계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호흡기질환, 눈, 피부 및 피하조직 질환자들을 대상으로 거주층과의 연관성도 파악했으나 이 또한 통계적 유의성은 찾기 어려웠다. 강인호 교수는 “유전적 특성이나 생활패턴이 아닌 주거환경은 질병 발생에서 작은 요소인 데다, 실제 거주자들에 대한 심층면접 등이 생략됐기 때문에 뚜렷한 결론을 도출해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국내 아파트 거주자들은 이사 주기가 짧아 신체가 환경 조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도 짚어내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박철수 교수(건축학)도 “고층 아파트에 사는 것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 됐다는 상징처럼 여겨지면서 병리 현상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강순주 교수(소비자주거학) 또한 “거주자들이 집값이 떨어질까 봐 쉬쉬하는 바람에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측면도 있다”며 연구조사의 한계를 털어놨다. 그렇다면 초고층 아파트로 이사 온 후 신체 이상이나 고통을 호소하는 거주자들의 주장을 근거 없는 하소연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전문가들은 “고층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면서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강순주 교수는 “고층 거주로 인한 고소공포증이나 귀울림 현상, 엘리베이터 스트레스, 유아들의 자립 저하 및 사회생활장애 등은 분명 적잖은 주거환경 스트레스로 작용해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며 “초고층 아파트가 계속 건설되는 만큼 관련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인호 교수도 “환경적 영향력을 갖는 호흡기 비염, 알레르기성 피부질환, 천식 등의 질병에서 주거 고층화의 영향 요인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철수 교수는 “민간 건설업체를 중심으로 확산된 ‘조망’ ‘전망’ ‘뷰(View)’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경향이 초고층 아파트의 다양한 잠재적 문제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풍수지리학자인 우석대 김두규 교수(교양학부)는 “고소공포증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거나 강물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청소년은 풍수적으로 고층 아파트에 살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