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B> KBS 촬영장.
이럴 때 가장 좋은 처방은 혼자 걷는 것이다. 화려한 단풍숲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디에서든 혼자 유유히 걸어보자. 한 곳을 골라달라고 한다면 문경새재 옛길을 꼽고 싶다.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시작해 제2관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이어지는 새재길. 부드러운 흙으로 길이 이어져 걷기도 편하다.
폭이 넓어 사람들과 걸어도 부대낄 일이 없는 마음 넓은 길이다. 자, 지금이다. 삶의 전쟁터에서 홀로 빠져나온 여유를 즐겨보자. 그리고 펑펑 눈물이라도 쏟아내며 가슴속에 고여 있던 응어리들을 문경새재 길에 녹여보자.
봇짐 가득 이야기 싣고 넘는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중앙과 영남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 초기에 개통된 이 길의 기원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남대로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만큼 당시 보부상들은 문경새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봇짐장사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이야기가 길에 담겼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이 대하소설 ‘객주’다. 작가 김주영은 문경새재를 작품 도입부에 넣으면서 조선시대 보부상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냈다. 높고 파란 하늘의 어느 가을날. 주흘관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자 사과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축제를 준비하는 이와 여행자들이 섞여 만들어낸 활기찬 분위기.
탐스러운 빨간 사과는 서둘러 길을 떠나는 여행자의 발목을 잡고는 기어코 몇 알을 챙겨 넣게 만든다. 가방은 보부상의 등짐처럼 든든하면서도 묵직하다. 제1관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는 주흘산이 자리하고 왼편의 KBS 촬영장 뒤로는 조령산이 펼쳐진다. 백두대간인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영남대로의 관문을 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빠뜨리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드라마 촬영장이다. ‘태조 왕건’을 촬영하기 위해 세운 이곳은 경복궁과 조선시대 종로거리 등으로 탈바꿈했는데 다양한 사극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된다. 촬영장을 나와서 조금 더 가면 예전 마을이 있던 자리가 나타나고 선정비들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한때 번성하던 곳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옛사람들을 만나는 한가로운 산책길
붉은색과 노란색의 나무터널을 지나면 조령원터가 나온다. 새재길에는 많은 역과 원이 있었는데 조령원터는 그중 하나다. 역은 관리들의 여행길에 편의를 제공하고 도로를 관리하던 곳, 원은 역의 보조시설로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영남대로에선 이런 역이 30여 개, 원이 165개소나 운영됐다. 특히 문경시 점촌의 유곡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커다란 돌로 지붕을 댄 입구를 지나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넓은 터가 나오고, 그 안에 촬영 세트장이 있다. 예전에는 쌀을 가져다 놓으면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이 음식을 해먹고 돈을 두고 갈 만큼 인심이 후한 곳이었다고 한다. 객주의 보부상들도 이곳에 머물며 그들의 아름다운 인심을 누렸으리라.
조령원터를 지나 이어진 길을 계속 걸으면 주막이 나온다. 과거 주막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들어놓은 곳으로, 93년 전 장사를 끝으로 사라진 주막의 오마주 같은 곳이다. 지금은 아무리 주모를 불러봐도 나오는 이 없지만, 먼 길을 떠난 사람들뿐 아니라 과거길에 오른 양반과 상인들이 함께 탁주와 국밥을 먹는 장면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B>2</B> 단풍이 곱게 물든 쉼터. <B>3</B> 문경새재 주막. <B>4</B> 촬영장 옆, 발 씻는 곳. <B>5</B> 해 저문 주흘관.
길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비석이 그 옛날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여행을 나선 젊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옛날옛날, 호랑이가 살던 때부터 산불은 무서운 것이었다”고 들려주는 모습도 정겹다.
‘소원을 말해봐’ 책바위
조곡관은 문경새재 길목 중 가장 오래된 관문이자 뛰어난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조령천과 조곡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군사 요충지였다. 과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이곳을 넘어 한양까지 침입해온 일이 있는데, 이 때문에 선조 27년 문경새재 관문 중 제일 먼저 축성됐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조곡관 부근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세운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있다. 걸어서 힘든 여정을 이어야 했던 양반네들과 보부상들의 한숨, 그리고 눈물겨운 발걸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다. 21세기를 사는 여행자도 여기서 숨을 고르며 과거를 돌아본다.
조곡문을 나와 제3관문인 조령관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는 거칠다. 이어지는 오르막에 조금씩 숨이 차 발걸음이 더뎌진다. 조령관에 다다를 즈음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책바위가 보인다. 문경새재가 과거길 또는 장원급제길이라 불리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이곳에서 연유한다.
오래전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이 돌무더기 앞에서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유명한 문경새재인 조령관에 이른다. 조령관은 풀과 억새로 우거진 고개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 할 만큼 예전에는 무척 힘든 고갯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조령관에 올라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과 마주하면 가슴속 때까지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천천히 여유부리면서 걸으니 3시간 정도가 흘렀다. 아름다운 길에서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끼며 과거로의 재미있는 상상여행을 하다 보니,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원이 깃들어 있는 길, 수많은 사람이 나름의 사정을 가슴에 두고 걸어간 길, 지방과 지방을 이어주며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길. 문경새재는 지금도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며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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