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산 유성가든의 간장게장 .2 목포의 신선한 세발낙지. 3 장흥 안양면 수문리 바다하우스의 키조개무침.
중독성 강한 술안주, 구룡포 과메기
지난해 입 짧기로 소문난 친구와 과메기를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익은 것도 아니고 날것도 아닌 게 이상해 못 먹겠어”란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렸는데, 며칠 전 그 친구가 과메기를 먹으러 포항에 가자는 것이 아닌가. 그는 1년 만에 과메기 마니아가 돼 있었다.
처음 입에 대기가 쉽지 않아 그렇지, 익숙해지기만 하면 매년 추운 계절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과메기.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과메기지만, 진정한 맛을 보려면 포항의 작은 어촌 구룡포에 가야 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포항 죽도시장에 과메기 전문점이 많다.
과메기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얼고 녹기를 15일 이상 반복하는 숙성과정 끝에 만들어진 건어물. 조금 비릿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대부분의 과메기는 꽁치로 만드는데, 꽁치 그대로보다 과메기로 만들었을 때 영양분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해장에 좋다는 아스파라긴 성분을 함유해 최고의 술안주로 꼽힌다.
과메기는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린다는 ‘관목청어(貫目靑魚)’에서 유래한 것으로, ‘관목’의 ‘관’과 영일만에서 목을 이르는 ‘메기’가 합쳐진 ‘관메기’에서 다시 과메기로 불리게 됐다. 마땅한 저장시설이 없던 시절, 바람을 이용해 간수하던 지혜가 담겨 있다. 날생선의 영양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린 생선 특유의 쫄깃함과 고소함이 살아 있다.
잊을 수 없는 ‘밥도둑’, 군산 간장게장
이맘때가 되면 머릿속에 솔솔 피어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밥도둑’ 간장게장이다. 풍성한 속살과 노란색 알이 담긴 게딱지,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게딱지 속에 비벼놓은 밥. 원래 게장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소금에 절였는데, 이것을 간장으로 바꾸면서 간장게장이 됐다. 간장으로 담근 꽃게는 소금에 절인 것보다 훨씬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난다.
간장게장은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특유의 감칠맛을 느끼지 못한다. 꽃게의 신선함이 살아 있어야 하고 간장은 너무 짜지도 텁텁하지도 않아야 하는데, 이러한 맛을 살려주면서 게장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전북 군산의 유성가든이다.
간장게장을 먹으면서 걱정스러운 것이 지나치게 짜지 않을까 하는 건데, 이곳의 간장게장은 장맛이 깔끔하다. 비결을 물으니, 간장을 덜 사용해 양념을 맑게 유지하고 모자란 간을 죽염으로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장을 주문하면 넓은 접시에 게장이 하나하나 먹기 좋게 잘라서 나온다. 그리고 게딱지에 붙은 알과 내장을 앞접시에 담아 참기름과 깨를 뿌려준다. 여기에 밥을 반 공기 정도 넣어 비빈 뒤 날김에 싸서 먹으면 신선한 꽃게의 향과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막 다이어트에 성공한 아가씨도, 기품 있는 중년신사도 소매 걷어붙이고 “공기밥 추가요!”를 외치게 되는 맛이다.
4 포항 일출의 명소 호미곶. 5 군산 금강하굿둑. 6 목포 북항 회타운. 7 장흥 여다지 해변에서 본 호수 같은 득량만.
간장게장으로 집 나간 입맛을 찾았다면, 이번엔 살아 있는 별미를 만나보자. 목포의 세발낙지다. 세발낙지는 가느다란 낙지 다리 때문에 이름에 ‘가늘 세(細)’자를 썼다. 칼로리가 낮고 지방이 적어 다이어트 식재료이기도 한 세발낙지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아침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게 하는 주범이다.
남도의 세발낙지 주산지는 무안을 비롯한 신안군 일대 섬들. 이 일대의 하늘이 내려준 갯벌에서 잡은 세발낙지는 대부분 목포로 모인다. 그래서 신안군의 세발낙지가 아닌 목포의 세발낙지로 유명해졌다.
오랜만에 목포가 고향인 친구와 함께 목포에서도 해산물을 푸짐하게 맛볼 수 있는 북항 회타운을 찾았다. 친구는 남도 특유의 사투리로 횟집 아주머니에게 “잘 좀 조사주세요”라고 한다. ‘조아주세요’는 ‘다져주세요’라는 뜻. 친구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아주머니는 칼을 들고 세발낙지를 다진다. 세발낙지는 젓가락에 둘둘 감아 한 입에 먹는 것 아닌가 하며 의아해하는데, 어느새 ‘조사진’ 낙지가 한 접시 앞에 놓인다. 그 맛은 각별했다.
갯벌에서 잡은 낙지를 먹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다져진 낙지는 자주 맛보지 못한 데다, 쫄깃한 식감과 잘게 썬 덕분인지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다진 낙지를 컵에 담아 날달걀을 넣고 저은 뒤 컵째 후루룩 마시기도 한다. 역시 모든 요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좋은 친구와 풀어놓은 일상의 고단함이 접시 위 하나둘 줄어드는 세발낙지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마음 맞는 이와 좋은 음식을 함께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만든다.
담백하고 고소한 맛 일품, 장흥 키조개
갯벌에서 나는 좋은 먹을거리 중에는 낙지 말고도 ‘조개의 왕’ 키조개가 있다. 남도의 갯벌 가운데서도 득량만은 영양분이 풍부한 질 좋은 어종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득량만을 품은 여러 곳 중 전남 장흥군 안양면의 수문, 용곡, 사촌, 율산, 수락리 등 5개 마을은 오래전부터 키조개 농사를 지을 만큼 모든 여건에서 최고의 키조개 산지로 알려졌다.
우리가 흔히 ‘가이바시’라 부르는 것이 바로 키조개 속살에 숨어 있는 패주다.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 쓰이며 여행자의 입맛을 돋워준다. 먹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보통 회로 먹으면 담백하고, 데쳐 먹으면 부드러우면서 쫄깃함이 살아 있고, 달콤새콤한 회무침으로 먹고 나중에 밥에 비벼먹는 맛이 기가 막히며, 프라이팬에 은박지를 깔고 살짝 익혀 먹는 구이는 고소함이 살아 있다.
이는 키조개 패주가 비리지 않고 담백하며 쫄깃한 식감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한우로도 유명한 장흥의 토요시장에 가면 장흥 특산품인 표고버섯, 한우 등심, 키조개 패주를 같이 구워먹을 수 있는데, 이른바 ‘장흥 삼합’이라 불리며 미식가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청준의 문학적 고향이며 차로 유명한 보림사가 있고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아름다운 천관산을 품은 장흥에서 자연산 석화구이와 함께 키조개를 맛보러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출발하기 전부터 괴는 침을 닦아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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