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1949 Number 8’
뉴스는 실재를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없지만 실재를 참조하게 한다는 점에서 삽화적이다. 삽화는 어떤 내용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이다. 모든 예술은 삽화의 수준을 뛰어넘어 그 자체로 독립된 실재가 되고자 한다. 예술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언어화하기 어려운 우리 삶의 관계망과 해소되기 힘든 갈등구조를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그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른 장르에 비해 그림이 어려운 것은 이 같은 갈등구조를 단숨에 한 공간에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고도로 압축된 상징 속에서 풍부한 세계를 읽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림은 시와 유사하다.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한눈에 파악된 작품에서 그 이면에 잠재된 갈등구조를 형사처럼 파악해 들어가는 작업이다.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디자인이고 삽화에 불과한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특정한 주의(ism)가 아니다. 억압된 실재의 진정한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 아카데믹한 권위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싸움의 대상 없이 혼자서 마냥 행복한 그림은 삽화일 수밖에 없다. 싸우는 상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림을 평가할 때 선행돼야 할 것은 작가가 대면하고 있는 상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대상은 동시대의 대가일수록 좋다. 그와 싸워 압도할 수 있다면 작가는 대가 반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에 살아남은 작가들은 반드시 이 조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