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동아’가 따스하고 속 깊은 여행 이야기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문화평론가 정윤수 씨가 길잡이하는 이 코너는 여느 여행기처럼 지역 정보를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지역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길과 삶을 성찰하는 기행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 편집자 -
여행의 목적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재충전’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은 문학평론가 김현에게 참다운 의미의 여행이 아니다. 그는 에세이 좋은 꿈꾸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사물들을 보지 않는다. 주위에 있는 사물들을 이용할 따름이다. 사물들은 도구성, 쓰임새에 국한되어 그 쓰임새 밖의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행은 때로 그 쓰임새를 지운다. 그래서 새롭게 보인다. 일 때문에 떠나는 여행은 말의 올바른 의미에서 여행이 아니다.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만이 여행이다.”
젊은 시절, 지중해로부터 삶의 비밀을 깨친 불문학자 김화영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지중해, 내 푸른 영혼에서 “수없이 떠나본 사람에게도 모든 ‘떠남’은 항상 최초의 경험이다. 떠나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교육할 수 없는 것이다. ‘미지의 것’, ‘다른 것’, ‘다른 곳’이 감추고 있는 ‘새로움’은 참으로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하게 하는데 그것이 힘이 있다”고 썼다. 아무래도 이런 경지의 여행에 동남아의 휴양지나 중국 골프여행은 끼어들기 어렵다. 그곳에서의 어색한 밤 유흥도 ‘색다른’ 여행이겠지만, 사람과 사물 사이의 수많은 곡선이 들려주는 경이로운 변주곡에 비할 바는 못될 것이다.
기차는 근대적 지평으로 맹렬히 질주한 우리 역사의 상징이다.
이를테면 국문학자 김윤식이 황홀경의 사상에 기록한 다음과 같은 순간들, 그러니까 위대한 예술과 자연과 그것을 동경해온 여행자가 빚어내는 거의 종교적 차원의 여행 체험이야말로 우리가 꽤 오랫동안 외면했던 인간적 경지인 것이다. “한파가 몰아닥친 1979년 한겨울, 푸생과 로댕의 그림 앞에 섰을 때의 그 가슴 설레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1982년 한여름 아프리카 사막을 헤매고 쪽빛 지중해를 넘어 마침내 다시 푸생과 로댕의 그 그림 앞에 섰을 때의 가슴 설레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러한 황홀경의 환각이 어찌 드레스덴이나 루브르에만 있겠는가. 일본의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며 가슴 설레던 1980년 초가을의 어느 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렇게 언급했을 뿐인데도 필자의 마음속에서 지금 막 기차가 떠나가고 있다. 아마 독자 여러분의 마음도 마치 라이터불이 단 한 번에 ‘탁!’ 하고 켜지듯이 저 태백산령의 간이역이며 줄포만의 갯벌이며 섬진강의 풀들과 서산 개심사의 벚꽃들, 몰운대의 바위와 양수리의 새벽 안개들이 일순간에 피고 지면서, 아차차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고 배낭부터 꾸릴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우선 기차부터 생각해보자.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기차는, 근대적 지평으로 맹렬히 질주한 우리 역사의 단단한 상징이다. 1917년에 이광수는 무정을 발표하면서, 문학과 사상의 야심찬 근대적 기획을 표방한 이 소설에서 그는 근대적 계몽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차를 설정하였다. 일본 유학을 결심한 영채와 병욱,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형식과 선형. 이 네 사람은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게 되고, 이들이 탄 기차가 물난리 때문에 삼랑진에 멈추자 농민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게 된다. 이 ‘선각자’들의 근대적 열망은 한 세기를 질주하면서 시속 300km의 KTX 시대를 열었다. 경부선의 그 장려한 곡선들을 겨우 대여섯 개의 큰 지점으로 압축시켜버리는 KTX의 질주는 직선의 속도를 열망했던 근대 산업화의 도전적 기운을 느끼게 한다.
한편 선생과 황태자로 유명한 소설가 송영에게 기차는 한계상황에 갇힌 인간들의 실존을 묻는 공간이며(중앙선 기차), 이문열에게 기차는 습작을 시작한 서울대 사대 시절, 사대문학회에 참여하여 처음 발표한 작품이며(이 황량한 역에서) 이동하에게 기차는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사회에서 거세되지 않은 야생적 생명력을 회복하는 의미이며(폭력연구) 황석영에게 기차는 정처 없는 사연들을 일순간이나마 위로해주는 따스한 거처였으니(삼포 가는 길, 바리데기), 기차는 곧 우리 문학사의 가장 풍성하고 애틋한 공간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마음속의 기차는 여전히 간이역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비둘기호며 무궁화호다. 2004년 4월1일, 거짓말처럼 시속 300km의 KTX가 개통되던 날, 서울 서부역에서 출발하여 능곡 원릉 송추를 거쳐 의정부로 달리던 교외선이 폐쇄되었는데,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저장된 기억마저 ‘삭제’된 것은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우울한 탐미주의자 윤후명의 소설로도 유명한 수인선 협궤열차도 그러하며, 이제는 하루 한 번 관광용으로만 운영되는 증산역과 아우라지역 사이의 정선선도 그러하다. 아, 지금도 저 태백준령을 휘감아도는 영동선은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는 깜짝 놀랄 만큼 흥미로운 감상을 제공하는 스위치백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으니(이마저도 곧 폐쇄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찌 서둘러 기차를 타지 않겠는가.
관광용 정선선, 스위치백 방식 등 더 늦기 전 체험을
기차를 타고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자. 물론 오늘날의 형편 때문에 언제나 기차를 타고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가족들을 태우고 중형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할지라도, 마음속의 여정만큼은 지난날 강릉행 밤차를 타기 위해 기묘한 정적이 흐르던 청량리역에 들어서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문학과 예술의 빛나는 성취들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 여행을 위하여 언제나 동반할 것이니, 이에 의지하여 우리 산과 강과 깊고 따뜻한 곳을 매주 여행한다면, 필경 우리의 내면과 주위 사물들은 간결한 직선 대신 미묘한 곡선을 선택하여 서로를 위로하고 깨치는 성찰의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강원도 태백이어도 좋다. 이미 그곳을 시인 최승호는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이라고 일러줬다. 서해의 작은 항구라도 좋다. 이미 그곳을 시인 황동규는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이라고 써서 우리의 부주의를 단속한 바 있다.
서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혹시 바람이 불었는가. 그렇다면 대합실 바깥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라도 피우면서, 방금 스쳐지나간 것이 그저 공기의 흐름이 아니라 귓가의 속삭임이며 콧등 위의 내음이며 몸을 살며시 감싼 대지의 속 깊은 인사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시인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의 한 대목이다. 이 빛나는 서정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 막차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조바심이 나면서도 한없이 그 시간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이한 마음으로 우리 새로운 여행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