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도라산에서 바라본 개성공단.
“존엄에 상처받았다” 북 태도 당분간 경직
이명박 정부를 바라보는 평양의 태도는 ‘기대’(대선 이전 및 직후)→‘의구심’(2월25일 취임사 이후)→‘배신감’(3월26일 통일부 업무보고)으로 바뀌었다.
평양은 당초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명목상 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이 대통령 취임식 때 보내는 안을 검토할 만큼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남북문제에 대해 호의적으로 언급해주길 기대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에 불만을 나타내는, 과거 연을 맺었던 남측 인사들을 평양이 달래는 모습도 수차례 포착됐다.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3월26일 이 대통령의 발언이 일종의 분수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남북 지도자들이 늘 통일을 부르짖었지만 전략적인 의미에서의 구호였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를 강조했다. 평양은 이를 6·15(2000년) 및 10·4(2007년) 공동선언을 부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북한 처지에서 기존 합의는 김 위원장의 업적이다. 이를 부인하면 곧 김 위원장을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평양이 물불 안 가리고 대응에 나선 까닭이다.
서울은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대해 ‘로키(low-key·과민하지 않게 차분하고 조용한)’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평양의 ‘길들이기’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대통령에게 보고된 한 국책연구기관의 ‘비핵·개방 3000’ 추진 전략에 따르면 지금은 ‘숨고르기’ 국면이다. ‘북한 길들이기’로 맞대응하면서 북한의 태도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
그러나 존엄에 상처를 입었다고 여긴 북한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길들이기 vs 길들이기’ 구도에 접어든 남북관계는 한동안 악화일로를 걸으리라는 예상이 많다. 평양이 ‘더욱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는 대북 소식통들의 한결 같은 전언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는다. 이 대통령의 후보 시절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에서 대북정책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한 A 교수는 “위기가 쉽게 해소되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이 대통령의 싱크탱크와 인수위에서 일한 B 교수도 “갈수록 태산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군 수뇌부 인사에서 합참의장에 내정된 김태영(육사 29기) 1군사령관이 3월26일 국회 국방위 인사청문회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쌀, 비료 지원 협상에서부터 남북관계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다. 갈등을 빚더라도 ‘주는 자’로서 갑(甲)의 지위를 확고히 하겠다는 것으로, 쌀과 비료 지원이 절박한 만큼 북한이 고개를 숙이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대남 도발에 나섬으로써 서울의 쌀, 비료 지원에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연초부터 중국과 쌀, 비료 지원 협상을 벌였다.
이명박 정부는 북미간 핵신고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문제에도 훈풍이 불 것이라 기대했지만, 북미관계와 6자회담의 진전과는 별개로 남북문제는 돌이키기 쉽지 않은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남북관계는 단절된 채 북미가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만들어낸 1994년 1차 핵위기 때가 연상된다는 것이다. 평양은 실제로 통미봉남(通美封南)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북간에는 현재 △공식-비공개(국가정보원-통일전선부) △공식-공개(통일부-통일전선부) △비선라인 등의 ‘대화 루트’가 모두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국정원이 3월 기존 라인을 통해 움직였지만 평양의 파트너를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의 카운터파트이던 북한 통일전선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숙정(肅正)으로 쑥대밭이 됐다.
그렇다면 평양의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먼저 개성공단의 북측 근로자들이 태업 혹은 파업을 벌이거나, 더 나아가 북측이 개성공단을 폐쇄할 가능성이 있다. 개성공단이 평양에 주는 실익은 “아직도 몇 푼 떼먹는 임가공 수준”이라고 불평할 만큼 크지 않다. ‘개성공단 카드’는 “북핵문제가 계속 타결되지 않고 문제로 남는다면 개성공단 확대는 어렵다”(김하중 통일부 장관)는 발언에 대한 맞대응의 의미도 갖는다.
두 번째는 북방한계선(NLL) 주변에서 국지적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NLL을 넘는 도발을 감행할 예상 시기로 이 대통령의 방미(訪美·4월15∼21일) 전후가 거론된다.
가능성은 낮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 북미관계도 위기로 치닫는 경우다. 이 경우엔 북한이 북핵문제의 시계침을 1년6개월 전으로 되돌리려 할 수도 있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2차 핵실험이 그것이다.
핵신고는 외견상 해결 쪽으로 가닥
그러나 북미관계의 발목을 잡아온 ‘핵신고’는 외견상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하다. 그동안 미국과 북한 간 ‘힐-김계관 채널’을 괴롭힌 단어는 ‘시리아’였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를 공격해온 강경파는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는데, 유대계 이익단체들의 요구사항인 북한-시리아 커넥션 의혹 규명은 우라늄 농축과 시리아에 대한 핵협력 의혹에 대해 북한이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미관계가 또 다른 비탈에 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평양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지난해보다 많이 줄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이 구두로 한 약속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반응도 평양 권부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난해 북미관계가 순항할 때 성가(聲價)가 한껏 높았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평양이 워싱턴에 ‘의문부호’를 찍어가는 과정에서 “미국 가서 포도주에 너무 취한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으며, 최근엔 그 위상도 약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관계가 해빙되면 북한이라는 배의 닻이 풀린다. 이명박 정부는 과연 그 배를 남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동북공정, 동북4성론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남북간 내교(內交)의 현 위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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