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티(官架子) 안 나는 복장(福將)’. 루잔궁(盧展工·56·사진) 푸젠(福建)성 당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을 이르는 말이다.
3600만 인구를 거느린 푸젠성의 당서기가 아니라 시골 촌서기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의 이력을 보면 복(福)이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운은 1999년 샤먼(廈門)에서 터졌다. 사회주의 중국 건립 이래 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에 푸젠성과 중앙 고위 지도부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대리성장이던 시진핑(習近平)은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아들, 자칭린(賈慶林) 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주석의 부인 린여우팡(林幼芳) 등 상상을 뛰어넘는 고위직 인사의 친인척이 범죄에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자 시 성장도 법대로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루잔궁은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웨이젠싱(尉健行)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 중앙지도부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의 뜻대로 사건은 처리됐다. 이에 따라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 했던 시 당시 푸젠 성장은 2002년 저장(浙江)성 대리성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반면 루잔궁은 2001년 1월 푸젠성 부서기, 2002년 10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3년 1월엔 성장으로 쾌속 승진했다.
두 번째 운은 2000년 12월 푸젠성 서기로 내려온 쑹더푸(宋德福, 1946~2007)가 폐암으로 2003년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부터다. 쑹 서기가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자 2004년 2월 당시 성장이던 루잔궁이 성의 대리서기로 당 업무까지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서기직에 올랐다. 쑹은 병이 깊어지자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직도 사직한 채 병마와 싸웠지만 지난해 9월 결국 세상을 등졌다.
복과 운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따르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게 아니다. 루 서기는 정치적 연줄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며 “시골에 내려가서는 우마차를 잘 잡아탔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과 공청단 지부 서기를 했듯, 기회를 잘 잡았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는 겸손의 말일 뿐이다. “난 단지 땅에 발을 디디고 착실하게 일했다.” 어느 회의석상에서 한 이 말처럼 그는 항상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먼 밀수사건 법대로 처리 쾌속 승진
한쪽만 있는 쌍꺼풀, 깊게 팬 주름살. 루 서기는 폼 재기 좋아하는 중국의 고위관리와는 영 딴판이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저장성 출신이지만 인생의 가장 귀중한 젊은 시절을 헤이룽장성에서 보냈다. 문화대혁명 시절인 1969년 고교를 마치자마자 머나먼 헤이룽장성의 푸민(富民)공사라는 농장에 배치돼 중국의 가장 추운 북쪽에서 무려 13년을 살았다.
“북대황(北大荒)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형식주의에 물들지 않고 ‘멋부리는 틀(花架子)’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인민을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만약 헤이룽장성의 13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루 서기는 언젠가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헤이룽장성에서의 젊은 시절은 그의 의지를 단련시켰고, 고통을 인내하면서 노력하는 정신을 배우게 했다.
루 서기는 무당파(無黨派) 인사다. 장쩌민 전 주석 시절 요직을 휩쓴 상하이방(上海幇)도, 요즘 기세를 올리는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웨이젠싱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헤이룽장성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를 눈여겨봤던 웨이젠싱은 1998년 10월 전국 총공회 주석으로 가면서 저장성 당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인 그를 중앙으로 끌어올려 부주석으로 데리고 갔다. 이후 그는 웨이젠싱의 심복이 됐고 웨이젠싱도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농민 먼저 고려 … ‘해안 서안 경제구’ 설치도 박차
중병에 걸렸던 쑹더푸 또한 그를 믿고 지원했다. 2004년 12월 성 서기로 정식 임명되기 직전 병문안을 위해 베이징을 찾은 그에게 쑹더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푸젠성에 애틋한 감정이 있다. 병이 난 뒤 나는 두 번의 감정 변화를 겪었다. 당신을 대리서기에 임명한 뒤 나는 손을 놓았고(放手), 당신을 서기로 임명한 뒤 마음을 놓았다(放心).” 쑹은 이렇게 말하며 “이제 걱정을 안 하게 됐다”고 기뻐했다.
농촌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그는 누구보다 먼저 농민을 고려한다. 푸젠성 성장으로 일하던 2003년 그는 푸젠성에서 농촌 주민의 최저생활보장제도를 시작했다. 수입이 연간 1000위안 이하인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2006년 5월 최저생계보조비를 받는 농민은 75만명에 달했다. 현재는 중국의 31개 성 대부분이 이를 시행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생계보조비는 매우 드문 제도였다.
2004년 1월부터 농민을 위해 ‘육천(六千) 수리공정’도 추진 중이다. 육천 공정이란 1000만 농민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고 1000개의 저수지를 개보수하며, 1000만 무(畝·1무는 약 201.7평으로 한 마지기에 해당) 경작지의 관개시설을 확보하고 1000만㎥의 목재산지에 물을 대며, 1000만 무의 토지 유실을 막고 1000리의 하천을 정비하는 것을 말한다. 5년에 걸쳐 시행되는 이 공정은 올해 마무리될 예정이다.
루 서기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개선이 푸젠성 경제발전의 관건이라 보고 이를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푸젠성에 ‘해안 서안 경제구’를 만들어 대만 기업을 대거 유치해 창장(長江) 삼각주와 주장(珠江) 삼각주의 중간에 자리한 푸젠성을 또 하나의 경제견인차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헤이룽장성의 지식청년에서 전문대 교수, 저장성 자싱(嘉興)시 서기에서 허베이(河北)성 부서기, 전국 총공회 부주석, 푸젠성 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강·남북과 중앙, 지방을 가로지르며 성실함 하나로 달려온 그가 앞으로 정치적 연줄이 없는 무당파로서 어디까지 나갈지 주목된다.
3600만 인구를 거느린 푸젠성의 당서기가 아니라 시골 촌서기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의 이력을 보면 복(福)이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운은 1999년 샤먼(廈門)에서 터졌다. 사회주의 중국 건립 이래 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에 푸젠성과 중앙 고위 지도부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대리성장이던 시진핑(習近平)은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아들, 자칭린(賈慶林) 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주석의 부인 린여우팡(林幼芳) 등 상상을 뛰어넘는 고위직 인사의 친인척이 범죄에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자 시 성장도 법대로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루잔궁은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웨이젠싱(尉健行)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 중앙지도부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의 뜻대로 사건은 처리됐다. 이에 따라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 했던 시 당시 푸젠 성장은 2002년 저장(浙江)성 대리성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반면 루잔궁은 2001년 1월 푸젠성 부서기, 2002년 10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3년 1월엔 성장으로 쾌속 승진했다.
두 번째 운은 2000년 12월 푸젠성 서기로 내려온 쑹더푸(宋德福, 1946~2007)가 폐암으로 2003년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부터다. 쑹 서기가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자 2004년 2월 당시 성장이던 루잔궁이 성의 대리서기로 당 업무까지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서기직에 올랐다. 쑹은 병이 깊어지자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직도 사직한 채 병마와 싸웠지만 지난해 9월 결국 세상을 등졌다.
복과 운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따르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게 아니다. 루 서기는 정치적 연줄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며 “시골에 내려가서는 우마차를 잘 잡아탔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과 공청단 지부 서기를 했듯, 기회를 잘 잡았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는 겸손의 말일 뿐이다. “난 단지 땅에 발을 디디고 착실하게 일했다.” 어느 회의석상에서 한 이 말처럼 그는 항상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먼 밀수사건 법대로 처리 쾌속 승진
한쪽만 있는 쌍꺼풀, 깊게 팬 주름살. 루 서기는 폼 재기 좋아하는 중국의 고위관리와는 영 딴판이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저장성 출신이지만 인생의 가장 귀중한 젊은 시절을 헤이룽장성에서 보냈다. 문화대혁명 시절인 1969년 고교를 마치자마자 머나먼 헤이룽장성의 푸민(富民)공사라는 농장에 배치돼 중국의 가장 추운 북쪽에서 무려 13년을 살았다.
“북대황(北大荒)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형식주의에 물들지 않고 ‘멋부리는 틀(花架子)’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인민을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만약 헤이룽장성의 13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루 서기는 언젠가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헤이룽장성에서의 젊은 시절은 그의 의지를 단련시켰고, 고통을 인내하면서 노력하는 정신을 배우게 했다.
푸젠의 농촌 여인들. 농촌에서 오래 생활한 루잔궁 서기는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육천 수리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농민 먼저 고려 … ‘해안 서안 경제구’ 설치도 박차
중병에 걸렸던 쑹더푸 또한 그를 믿고 지원했다. 2004년 12월 성 서기로 정식 임명되기 직전 병문안을 위해 베이징을 찾은 그에게 쑹더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푸젠성에 애틋한 감정이 있다. 병이 난 뒤 나는 두 번의 감정 변화를 겪었다. 당신을 대리서기에 임명한 뒤 나는 손을 놓았고(放手), 당신을 서기로 임명한 뒤 마음을 놓았다(放心).” 쑹은 이렇게 말하며 “이제 걱정을 안 하게 됐다”고 기뻐했다.
농촌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그는 누구보다 먼저 농민을 고려한다. 푸젠성 성장으로 일하던 2003년 그는 푸젠성에서 농촌 주민의 최저생활보장제도를 시작했다. 수입이 연간 1000위안 이하인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2006년 5월 최저생계보조비를 받는 농민은 75만명에 달했다. 현재는 중국의 31개 성 대부분이 이를 시행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생계보조비는 매우 드문 제도였다.
2004년 1월부터 농민을 위해 ‘육천(六千) 수리공정’도 추진 중이다. 육천 공정이란 1000만 농민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고 1000개의 저수지를 개보수하며, 1000만 무(畝·1무는 약 201.7평으로 한 마지기에 해당) 경작지의 관개시설을 확보하고 1000만㎥의 목재산지에 물을 대며, 1000만 무의 토지 유실을 막고 1000리의 하천을 정비하는 것을 말한다. 5년에 걸쳐 시행되는 이 공정은 올해 마무리될 예정이다.
루 서기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개선이 푸젠성 경제발전의 관건이라 보고 이를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푸젠성에 ‘해안 서안 경제구’를 만들어 대만 기업을 대거 유치해 창장(長江) 삼각주와 주장(珠江) 삼각주의 중간에 자리한 푸젠성을 또 하나의 경제견인차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헤이룽장성의 지식청년에서 전문대 교수, 저장성 자싱(嘉興)시 서기에서 허베이(河北)성 부서기, 전국 총공회 부주석, 푸젠성 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강·남북과 중앙, 지방을 가로지르며 성실함 하나로 달려온 그가 앞으로 정치적 연줄이 없는 무당파로서 어디까지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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