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제츠(楊潔)
지난해 4월27일 리자오싱(李肇星·68) 후임으로 양제츠(楊潔·58·사진) 외교부 부부장이 제10대 외교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외국인은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 ’자는 사실 중국에서도 이름에 잘 쓰지 않는 벽자(僻字)다. ‘’는 당초 8개의 관이 있는 고대 죽관악기를 말한다. 고대 악기 진품은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공자 사당(孔廟)’에만 있다고 전한다.
1950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부친은 호랑이띠 해에 태어난 그가 성격이 사납지만 말고 온유함과 강인함을 겸비하라는 뜻으로 ‘호랑이 호(虎)’자에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를 씌웠다고 한다. 작명이 효과를 발휘했을까? 학자 타입의 그는 성격도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래서인지 5000명 외교부 직원 중엔 그가 외교부장에 오를 때까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양 부장은 말 그대로 ‘미국통(美國通)’이다. 주미 대사 4년을 포함해 주미 중국대사관에서만 세 번에 걸쳐 10년을 근무했다. 본국에 돌아와서도 11년1개월간 미국을 담당하거나 영·미권 국가의 통역으로 활약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가 이런 그를 외교부장에 앉힌 것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양 부장은 부시 대통령 집안과는 30년 가까운 교분이 있다. 1977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티베트자치구까지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다. 이때 아버지 부시와 매우 친해졌고 아버지 부시는 그에게 ‘타이거 양(Tiger Yang)’이라는 별호를 지어줬다. 외교부장에 임명된 것도 부시 일가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미국에 대한 이해와 평소 관리해온 인맥은 2001년 4월 중국 남중국해 하이난(海南) 섬에서 미 해군의 EP-3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해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고 조종사가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큰 힘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 국무원, 의회 등 미국 권력기관과 대사관을 하루 네 번이나 오가며 중국 측 입장을 설명했다. 또 같은 날 그는 CNN 등 미국 TV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한쪽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다른 한쪽은 차만 부서졌다면 어느 쪽이 먼저 사과하느냐”라는 미국 일상생활의 논리를 활용해, 미국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미국인의 여론을 20%에서 단박에 5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양 부장은 문화대혁명 당시 농촌 벽지로의 하방(下放) 광풍에도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집에서 가까운 상하이 푸장(浦江)의 적산전력계 공장에서 학도공으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문혁 기간이던 1973년엔 첫 번째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돼 영국에서 유학하는 행운이 뒤따랐다. 부인 러아이메이(樂愛妹) 씨는 이때 만났다.
나이와 경력으로 볼 때 그는 외교부장직을 마친 뒤에도 부총리급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에 오르는 행운이 뒤따를 것 같다.
멍젠주(孟建柱)
“부자가 되고 싶으면 멍젠주를 주저앉혀라(要想富 留住孟建柱).”
2004년 초부터 장시(江西)성 주민들 사이에서 나돌기 시작한 말이다. 이들이 2007년 10월 공안부장에 임명된 멍젠주(孟建柱·61·사진) 전 장시성 당서기를 계속 붙잡으려 했던 까닭은 그가 성 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멍 서기가 부임한 2001년 장시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221위안. 산시(山西),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등 ‘중부 굴기(·#54366;起)’ 6개 성 가운데 꼴찌였다. 하지만 2006년 장시성 1인당 GDP는 1만798위안으로 그가 당서기를 역임한 지 5년 만에 2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처럼 단기간에 GDP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멍 서기가 농촌과 동부지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시성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3개월 만에 장시성의 60개 현 2만5000리(약 1만2500km)를 돌며 성내 시찰에 나섰다. 2005년 3월까지 성내 99개 현과 시·구를 모두 직접 누볐다. 상하이에서 32년 이상 근무한 경험을 살려 상하이는 물론 창장(長江)강, 주장(珠江)강 지역과 푸젠(福建)성 등 인근 동부 성과도 협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 후반 후베이성의 발전을 위해 샤전쿤(夏振坤) 화중(華中)과기대 교수가 제기한 ‘중부 굴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후일 “중부 굴기는 장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써먹은 말”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고졸 학력의 멍 서기는 당초 상하이 창싱(長興) 섬의 전위(前衛)농장에서 경운기를 모는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하지만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해 1986년 경제관리통신대학을 졸업했고, 이어 1991년엔 상하이기계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관직길에서도 타고난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13년 만에 농장의 농장장으로 올라섰고, 농장을 우연히 견학했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당시 상하이시 조직부장)이 그를 상하이 인근 촨사(川沙)현 서기로 발탁하면서 출세길에 들어섰다.
1996년 10월 상하이시 부서기까지 올라간 그는 2001년 3월 후진타오 지도부의 출범을 앞두고 지도부 개편과정에서 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된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서기에게 밀려 장시성 서기로 전보됐다.
하지만 쩡 부주석은 지난해 10월 지도부에서 물러나며 ‘상하이방(上海幇) 주자’ 중 한 명인 그를 잊지 않았고 공안부장에 추천해 결국 관철시켰다. 그가 전혀 경험이 없는 공안 수장에 임명되자 홍콩 언론은 후 주석이 검찰과 법원, 공안으로 구성된 사법부 전체 권한에서 공안 부문을 억제하기 위해 내놓은 카드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80만 경찰을 이끄는 공안 수장에 임명된 그가 베이징올림픽을 잘 치르고 5년 뒤에도 출세가도를 이어나갈지 주목된다.
장칭웨이(張慶偉)
올해 5월11일 중국이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꿈을 안고 설립한 중국상용(商用)비행기유한책임공사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장칭웨이(張慶偉·47·사진) 전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주임. 그는 당초 중국의 국방과학을 책임지는 장관급 관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중국의 40대 장관급은 단 5명에 불과하다. 6세대 선두주자인 그가 새로 설립된 국유기업의 최고 책임자로 나섰다.
중국 정부가 자본금 190억 위안(약 2조8500억원)을 들여 설립한 중국상용비행기유한책임공사는 앞으로 이륙중량 100t, 승객 150명 이상의 대형항공기를 2020년까지 세계시장에 출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현재 세계 대형항공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양분하고 있다. 중국 자주기술로 이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중국 정부가 이런 막중한 임무를 장 전 주임에게 맡긴 것은 그가 중국이 자랑하는 ‘항공 우주 분야의 젊은 1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이 운반로켓 핵심 기술을 장악하지 못해 위성 발사에 계속 실패할 때 이를 극복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데 이어, 유인우주선의 성공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에서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실현한 주역’으로 불린다.
장 이사장의 조적(祖籍)은 허베이(河北)성 라오팅(樂亭)현이지만 지린(吉林)성 지린시에서 태어나 장시(江西)성에서 자랐다. ‘樂’은 당초 ‘러’나 ‘웨’로 읽지만 이곳 지명은 ‘라오’로 발음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다. 중국의 전통악기 얼후(二胡)를 잘 연주했고 피리도 곧잘 불어 학교 악대에서 활동했다. 학교 성적 또한 매우 뛰어났지만 문화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1977년 12월 실시된 대학입학 시험에서 뜻밖에 낙방했다. 1년을 더 공부해 이듬해 시안(西安)에 있는 시베이(西北)공업대에 합격했다.
석사까지 마치고 1988년 4월 항공항천(航空航天)공업부 1원1부11실 공정조에서 항공설계 및 우주개발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중국 우주항공 개발사나 마찬가지다. 1996년 2월과 8월 발사한 운반로켓이 도중에 추락하거나, 싣고 올라간 위성이 목표 궤도에 도달하지 못해 실의에 빠졌을 때 그는 중국운반로켓기술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이듬해 5월 결국 성공시켰다. 2002년 12월에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항천(航天)과기집단공사의 총경리 겸 당조(黨組)서기를 맡아 2002년 3월 무인우주선 선저우 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하지만 항공우주 산업과 대형항공기 산업은 크게 다르다. 게다가 대형항공기 제작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단 6개국만이 기술을 갖고 있을 정도로 첨단기술이 필요하다. 지난해 70~90석 규모의 중형비행기의 국산화에 성공한 중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주공간에 우주선을 쏘아올려 ‘중국 천년의 꿈’을 실현한 그가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또 다른 중국인의 꿈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지 중국은 물론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
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47·사진)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 주석은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의 40대 부장·성장급(장관급) 인사다.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지도자 후보군으로 불리는 40대 부장급 인사는 현재 누얼 바이커리 주석을 비롯해 저우창(周强·48) 후난(湖南)성장, 후춘화(胡春華·45)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 쑨정차이(孫政才·45) 농업부장, 루하오(陸昊·41)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 등 5명뿐이다.
하지만 중화권 언론은 그에게 선뜻 ‘6세대 선두주자’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있다. 40대에 주석직에 올랐지만 능력보다는 소수민족 배려 차원이라는 의구심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과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단순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한족(漢族) 동화정책에 호응하는 철저한 반(反)분리주의자다. 1990년대 중반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친구가 물었다.
“너는 신장이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나?”
그러자 그가 되물었다.
“너, 콜럼버스가 미국을 언제 발견했는지 아니?”
그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은 1492년이지만 중국이 신장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1500년 앞선 서한(西漢) 때부터”라고 말해줬다. 그는 평소 “나는 위구르족 주석이기에 앞서 중국인이고 공산당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 소수민족 언어와 함께 반드시 한어를 배우도록 한 중앙정부의 이중 언어교육(雙語敎育) 정책을 철저히 지지한다. 상당수 위구르인들은 “이 정책은 우리 언어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거부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 왜 외국어를 배우느냐”며 “한족의 말을 배우는 것은 신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중국어 구사능력은 한족을 뺨칠 정도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을 가장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소수민족 출신 간부인 셈이다.
누얼 주석은 1961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서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보러(博樂)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신장(新疆)대 정치학부에 합격했다. 졸업한 뒤에도 대학에 남아 10년간 재직하면서 대학의 공청단 서기와 대학 당위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어 인구 350만명의 변경 도시 카스(喀什)시 행정공서(行政公署) 부(副)전원(專員·최고지도자)을 거쳐 36세 나이로 자치구 성도인 우루무치의 시장을 지냈다. 당시 그는 자치구 내 시장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우루무치 시장 시절엔 산업시설과 자동차에서 나오는 오염을 크게 줄이고 녹화사업을 강력 추진해 맑은 날을 좀처럼 볼 수 없던 시내 대기오염을 크게 줄였다.
2000년 12월 중국 공산당 신장자치구 당위원회가 젊은 상무위원을 찾을 때 그는 최적임자였다. 47세에 자치구 주석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해 부총리급 이상의 영도자급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4월27일 리자오싱(李肇星·68) 후임으로 양제츠(楊潔·58·사진) 외교부 부부장이 제10대 외교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외국인은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 ’자는 사실 중국에서도 이름에 잘 쓰지 않는 벽자(僻字)다. ‘’는 당초 8개의 관이 있는 고대 죽관악기를 말한다. 고대 악기 진품은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공자 사당(孔廟)’에만 있다고 전한다.
1950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부친은 호랑이띠 해에 태어난 그가 성격이 사납지만 말고 온유함과 강인함을 겸비하라는 뜻으로 ‘호랑이 호(虎)’자에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를 씌웠다고 한다. 작명이 효과를 발휘했을까? 학자 타입의 그는 성격도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래서인지 5000명 외교부 직원 중엔 그가 외교부장에 오를 때까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양 부장은 말 그대로 ‘미국통(美國通)’이다. 주미 대사 4년을 포함해 주미 중국대사관에서만 세 번에 걸쳐 10년을 근무했다. 본국에 돌아와서도 11년1개월간 미국을 담당하거나 영·미권 국가의 통역으로 활약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가 이런 그를 외교부장에 앉힌 것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양 부장은 부시 대통령 집안과는 30년 가까운 교분이 있다. 1977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티베트자치구까지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다. 이때 아버지 부시와 매우 친해졌고 아버지 부시는 그에게 ‘타이거 양(Tiger Yang)’이라는 별호를 지어줬다. 외교부장에 임명된 것도 부시 일가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미국에 대한 이해와 평소 관리해온 인맥은 2001년 4월 중국 남중국해 하이난(海南) 섬에서 미 해군의 EP-3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해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고 조종사가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큰 힘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 국무원, 의회 등 미국 권력기관과 대사관을 하루 네 번이나 오가며 중국 측 입장을 설명했다. 또 같은 날 그는 CNN 등 미국 TV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한쪽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다른 한쪽은 차만 부서졌다면 어느 쪽이 먼저 사과하느냐”라는 미국 일상생활의 논리를 활용해, 미국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미국인의 여론을 20%에서 단박에 5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양 부장은 문화대혁명 당시 농촌 벽지로의 하방(下放) 광풍에도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집에서 가까운 상하이 푸장(浦江)의 적산전력계 공장에서 학도공으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문혁 기간이던 1973년엔 첫 번째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돼 영국에서 유학하는 행운이 뒤따랐다. 부인 러아이메이(樂愛妹) 씨는 이때 만났다.
나이와 경력으로 볼 때 그는 외교부장직을 마친 뒤에도 부총리급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에 오르는 행운이 뒤따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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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젠주(孟建柱)
“부자가 되고 싶으면 멍젠주를 주저앉혀라(要想富 留住孟建柱).”
2004년 초부터 장시(江西)성 주민들 사이에서 나돌기 시작한 말이다. 이들이 2007년 10월 공안부장에 임명된 멍젠주(孟建柱·61·사진) 전 장시성 당서기를 계속 붙잡으려 했던 까닭은 그가 성 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멍 서기가 부임한 2001년 장시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221위안. 산시(山西),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등 ‘중부 굴기(·#54366;起)’ 6개 성 가운데 꼴찌였다. 하지만 2006년 장시성 1인당 GDP는 1만798위안으로 그가 당서기를 역임한 지 5년 만에 2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처럼 단기간에 GDP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멍 서기가 농촌과 동부지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시성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3개월 만에 장시성의 60개 현 2만5000리(약 1만2500km)를 돌며 성내 시찰에 나섰다. 2005년 3월까지 성내 99개 현과 시·구를 모두 직접 누볐다. 상하이에서 32년 이상 근무한 경험을 살려 상하이는 물론 창장(長江)강, 주장(珠江)강 지역과 푸젠(福建)성 등 인근 동부 성과도 협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 후반 후베이성의 발전을 위해 샤전쿤(夏振坤) 화중(華中)과기대 교수가 제기한 ‘중부 굴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후일 “중부 굴기는 장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써먹은 말”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고졸 학력의 멍 서기는 당초 상하이 창싱(長興) 섬의 전위(前衛)농장에서 경운기를 모는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하지만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해 1986년 경제관리통신대학을 졸업했고, 이어 1991년엔 상하이기계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관직길에서도 타고난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13년 만에 농장의 농장장으로 올라섰고, 농장을 우연히 견학했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당시 상하이시 조직부장)이 그를 상하이 인근 촨사(川沙)현 서기로 발탁하면서 출세길에 들어섰다.
1996년 10월 상하이시 부서기까지 올라간 그는 2001년 3월 후진타오 지도부의 출범을 앞두고 지도부 개편과정에서 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된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서기에게 밀려 장시성 서기로 전보됐다.
하지만 쩡 부주석은 지난해 10월 지도부에서 물러나며 ‘상하이방(上海幇) 주자’ 중 한 명인 그를 잊지 않았고 공안부장에 추천해 결국 관철시켰다. 그가 전혀 경험이 없는 공안 수장에 임명되자 홍콩 언론은 후 주석이 검찰과 법원, 공안으로 구성된 사법부 전체 권한에서 공안 부문을 억제하기 위해 내놓은 카드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80만 경찰을 이끄는 공안 수장에 임명된 그가 베이징올림픽을 잘 치르고 5년 뒤에도 출세가도를 이어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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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웨이(張慶偉)
올해 5월11일 중국이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꿈을 안고 설립한 중국상용(商用)비행기유한책임공사의 이사장으로 취임한 장칭웨이(張慶偉·47·사진) 전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주임. 그는 당초 중국의 국방과학을 책임지는 장관급 관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중국의 40대 장관급은 단 5명에 불과하다. 6세대 선두주자인 그가 새로 설립된 국유기업의 최고 책임자로 나섰다.
중국 정부가 자본금 190억 위안(약 2조8500억원)을 들여 설립한 중국상용비행기유한책임공사는 앞으로 이륙중량 100t, 승객 150명 이상의 대형항공기를 2020년까지 세계시장에 출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현재 세계 대형항공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양분하고 있다. 중국 자주기술로 이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중국 정부가 이런 막중한 임무를 장 전 주임에게 맡긴 것은 그가 중국이 자랑하는 ‘항공 우주 분야의 젊은 1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이 운반로켓 핵심 기술을 장악하지 못해 위성 발사에 계속 실패할 때 이를 극복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데 이어, 유인우주선의 성공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에서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실현한 주역’으로 불린다.
장 이사장의 조적(祖籍)은 허베이(河北)성 라오팅(樂亭)현이지만 지린(吉林)성 지린시에서 태어나 장시(江西)성에서 자랐다. ‘樂’은 당초 ‘러’나 ‘웨’로 읽지만 이곳 지명은 ‘라오’로 발음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다. 중국의 전통악기 얼후(二胡)를 잘 연주했고 피리도 곧잘 불어 학교 악대에서 활동했다. 학교 성적 또한 매우 뛰어났지만 문화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1977년 12월 실시된 대학입학 시험에서 뜻밖에 낙방했다. 1년을 더 공부해 이듬해 시안(西安)에 있는 시베이(西北)공업대에 합격했다.
석사까지 마치고 1988년 4월 항공항천(航空航天)공업부 1원1부11실 공정조에서 항공설계 및 우주개발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중국 우주항공 개발사나 마찬가지다. 1996년 2월과 8월 발사한 운반로켓이 도중에 추락하거나, 싣고 올라간 위성이 목표 궤도에 도달하지 못해 실의에 빠졌을 때 그는 중국운반로켓기술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이듬해 5월 결국 성공시켰다. 2002년 12월에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항천(航天)과기집단공사의 총경리 겸 당조(黨組)서기를 맡아 2002년 3월 무인우주선 선저우 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하지만 항공우주 산업과 대형항공기 산업은 크게 다르다. 게다가 대형항공기 제작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단 6개국만이 기술을 갖고 있을 정도로 첨단기술이 필요하다. 지난해 70~90석 규모의 중형비행기의 국산화에 성공한 중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주공간에 우주선을 쏘아올려 ‘중국 천년의 꿈’을 실현한 그가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또 다른 중국인의 꿈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지 중국은 물론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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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
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47·사진)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 주석은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의 40대 부장·성장급(장관급) 인사다.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지도자 후보군으로 불리는 40대 부장급 인사는 현재 누얼 바이커리 주석을 비롯해 저우창(周强·48) 후난(湖南)성장, 후춘화(胡春華·45)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 쑨정차이(孫政才·45) 농업부장, 루하오(陸昊·41)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 등 5명뿐이다.
하지만 중화권 언론은 그에게 선뜻 ‘6세대 선두주자’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있다. 40대에 주석직에 올랐지만 능력보다는 소수민족 배려 차원이라는 의구심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과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단순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한족(漢族) 동화정책에 호응하는 철저한 반(反)분리주의자다. 1990년대 중반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친구가 물었다.
“너는 신장이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나?”
그러자 그가 되물었다.
“너, 콜럼버스가 미국을 언제 발견했는지 아니?”
그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은 1492년이지만 중국이 신장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1500년 앞선 서한(西漢) 때부터”라고 말해줬다. 그는 평소 “나는 위구르족 주석이기에 앞서 중국인이고 공산당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 소수민족 언어와 함께 반드시 한어를 배우도록 한 중앙정부의 이중 언어교육(雙語敎育) 정책을 철저히 지지한다. 상당수 위구르인들은 “이 정책은 우리 언어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거부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 왜 외국어를 배우느냐”며 “한족의 말을 배우는 것은 신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중국어 구사능력은 한족을 뺨칠 정도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을 가장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소수민족 출신 간부인 셈이다.
누얼 주석은 1961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서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보러(博樂)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신장(新疆)대 정치학부에 합격했다. 졸업한 뒤에도 대학에 남아 10년간 재직하면서 대학의 공청단 서기와 대학 당위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어 인구 350만명의 변경 도시 카스(喀什)시 행정공서(行政公署) 부(副)전원(專員·최고지도자)을 거쳐 36세 나이로 자치구 성도인 우루무치의 시장을 지냈다. 당시 그는 자치구 내 시장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우루무치 시장 시절엔 산업시설과 자동차에서 나오는 오염을 크게 줄이고 녹화사업을 강력 추진해 맑은 날을 좀처럼 볼 수 없던 시내 대기오염을 크게 줄였다.
2000년 12월 중국 공산당 신장자치구 당위원회가 젊은 상무위원을 찾을 때 그는 최적임자였다. 47세에 자치구 주석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해 부총리급 이상의 영도자급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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