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훈 가톨릭대 의과대학 소아청소년과 교수. 홍태식
두뇌 발달 전문가인 김영훈 가톨릭대 의과대학(가톨릭의대)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과도한 영유아 사교육의 부작용을 이같이 지적했다. 소아청소년과·소아신경과 전문의로서 가톨릭의대 의정부성모병원장을 지낸 김 교수는 30년 넘게 의료 현장에서 어린아이의 뇌 발달과 신경 건강, 효율적 교육 방법 등을 연구해왔다. 지금도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 회장, 한국두뇌교육학회 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김 교수가 요즘 들어 예의주시하는 게 영유아 사교육의 폐해다.
“3세 이전은 모국어 발달되는 중요한 시기”
최근 사교육계에선 취학 전 유명 학원 입시를 준비하는 ‘7세 고시’는 물론, 영어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한 ‘4세 고시’가 유행하고 있다. 우리말도 서툰 유아에게 영어 알파벳을 가르치는 사교육이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영유아 사교육은 학습에 노출되는 시기를 앞당겨 다른 아이들을 앞서자는 것인데, 이는 뇌 발달 원리를 모르는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교육 방식”이라고 우려했다. 3월 22일 김 교수를 만나 최근 영유아 사교육 문제점과 올바른 뇌 발달 방식에 대해 물었다.
최근 부모 사이에서 영유아 때 영어를 마스터하고 초등학생 때 수학을 정복하는 사교육 로드맵이 유행한다고 한다.
“영어와 모국어는 물론, 수학 학습도 놓칠 수 있는 방식이다. 조기 외국어 교육은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 모국어가 성숙해야 문제해결력과 창의력이 발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논리력이 생긴다. 아이의 발달 단계에서 3세 이전은 모국어를 익히는 중요한 시기다. 인간은 모국어를 통해 사고(思考)하고, 윤리의식도 이 같은 언어 능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나중에 모든 학습의 기초가 되는 문제해결력과 창의력도 모국어 능력이 없으면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다. 이토록 중요한 모국어를 익혀야 할 시기에 영어부터 가르치는 것은 기반 없이 집을 짓는 격이다. 게다가 영어를 지나치게 일찍 가르치면 나중에 수학 능력도 뒤떨어질 수 있다. 수학이란 연산뿐 아니라 사고력에 기반한 학문 아닌가. 모국어에 토대를 둔 언어 능력과 여기서 비롯되는 문해 능력이 없으면 문제와 맥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서울 한 영어유치원에서 취학 전 아이들이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있다. 동아DB
“영유아 사교육, 기초공사 없이 집 짓는 격”
아이를 일찌감치 다양한 학습에 노출시키면 유리한 것 아닌가.
“인간의 뇌 발달 단계를 고려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뇌 발달에는 크게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집을 지을 때 기초를 만드는 격인 ‘경험 기대적 발달’이 있다. 시각과 청각 같은 감각이나 사고력, 사회성, 운동 능력 발달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 발달 단계인 것이다. 반면 기초 위에 실제로 집을 짓는 것과 같은 뇌 발달이 ‘경험 의존적 발달’이다. 아이가 태어난 뒤 경험하는 언어적·자연적 환경을 통해 형성된다. 이 두 가지 뇌 발달 단계에 필요한 교육 방식의 핵심이 서로 다르다. 전자는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 후자는 교육에 얼마나 많은 시간 노출되는지가 관건이다. 기초 발달에 해당하는 시각, 청각, 사고력은 외부 자극에 노출되는 시기가 중요하다. 이 시기를 일단 놓치면 10배 넘는 시간 동안 노출되더라도 효과는 20∼30%밖에 안 된다. 최근 영아 사교육의 문제점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될 공부 때문에 정작 적기를 놓쳐선 안 되는 다양한 발달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된 기초공사 없이 집을 짓는 격이다.”
‘경험 의존적 발달’이 본격화되는 5∼6세에 적절한 교육 방식은.
“이 시기 아이들은 이전까지 쌓은 두뇌 발달의 기초 위에서 자기 재능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 아이가 언어, 과학, 예술 등 어느 분야에 관심을 갖는지 유심히 살피고 관련 분야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게 해주는 게 좋다. 또한 아이가 자기 유능감을 느낄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도록 돕는 것도 좋다. 주변에서 이 나이 때 아이가 어려운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거나 유행하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를 모두 꿰뚫고 있는 경우가 적잖다. 이 또한 아이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판단하고 집중하는 법을 키우는 활동이다. 아이는 특정 분야에 ‘덕후’가 됨으로써 문제해결 능력을 키운다. 이게 바로 창의력이다.”
김 교수가 영유아 사교육과 관련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아이의 정신건강에 끼치는 악영향이다. 김 교수는 “영유아에게 과도한 교육을 시킴으로써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그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로, 아이에게 인지·행동·신체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근 초등학교에도 가지 않은 아이 중 두통이나 틱, 심지어 우울증 환자가 많아졌다.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아이가 영어유치원에서 과도한 학습 스트레스에 노출된 경우가 적잖다. 기존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아이는 주로 초등학생이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미취학 아이마저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꽤 있다. 과도한 영유아 사교육으로 정신의학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학습 스트레스에 따른 우울감이 지속되면 아이 뇌는 그것에 맞춰 변형된다. 자칫 정서적 문제가 영구화될 수도 있다.”
“유치원생 두통이나 우울증 유발 우려”
아이가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디지털 미디어에 노출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던데.
“요즘 어린아이를 달랠 목적으로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부모가 꽤 있는데 큰 문제다. 생후 24개월 전 디지털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무엇보다 언어 발달이 저해된다. 아이의 언어 능력은 부모와 눈을 마주치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키워진다. 여기에 디지털 미디어가 개입되면 부모와 애착 형성, 이에 기초한 언어 발달이 방해받을 수 있다. 또한 과도한 디지털 미디어 몰입은 아이의 ‘유사 자폐’ 현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아님에도 아이가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신체 활동이 적어지는 문제도 생긴다. 이 같은 이유로 미국 소아과학회와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생후 24개월 전 아이에게는 아예 디지털 미디어를 보여주지 말라고 권고한다.”
“조기 사교육을 안 시켰다가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가진 부모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창의력을 갖춘 ‘평생학습자’가 되는 게 중요하다. 아이가 조기 사교육을 통해 이른바 명문고, 명문대에 진학하더라도 ‘훈장(勳章)’은 될지언정 평생 필요한 역량을 갖추기는 어렵다. 심지어 주입식 조기 사교육을 받은 아이는 입시 공부에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아이의 두뇌 발달과 정신 건강, 향후 학습 능력까지 해치는 조기 영유아 사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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