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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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위한 개인의 희생은 참인가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입력2008-04-11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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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위한 개인의 희생은 참인가

    조지 오웰의 우화소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돼지 ‘나폴레옹’. 오웰은 나폴레옹의 캐릭터를 통해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했다.

    ‘해방이 왔다. 한 생원은 일본인에게 판 논을 다시 찾을 수 있겠다는 설렘에 들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 후, “차라리 나라 없는 백성이 낫다. (…)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라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채만식의 소설 ‘논 이야기’(1946년)의 주인공 한 생원에게 개인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 공동체는 쓸모가 없다. 반면 조지 오웰의 우화소설 ‘동물농장’(민음사)의 복서(말)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한 채 공동체를 위해 맹목적으로 희생한다. 물론 독재자 나폴레옹(돼지)의 언론통제, 정보독점 등의 탓이 컸다. 그럼에도 결국 도살장으로 폐기처분 당하는 복서의 죽음은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과연 참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프러시아 군대가 프랑스의 루앙 시에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피난을 가기 위해 루세(비곗덩어리) 양이 프러시아 장교와 자주기를 암묵적으로 바란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무사히 피난을 갔다. 그런데 비곗덩어리가 돌아오자 사람들은 “치마 밑에 무슨 전염병이나 가져온 것처럼 그 여자를 멀리했다.” 모파상의 소설 ‘비곗덩어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복서와 비곗덩어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을 공익의 제단에 바친(또는 바쳐진) ‘희생양’들이다. 하지만 복서는 무의미하게 죽고, 비곗덩어리는 동정은커녕 ‘왕따’를 당한다. 물론 개인의 작은(?) 희생이 ‘좀더 큰’ 공동체의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 늘 진리는 아니다. 더구나 ‘그 사실’ 안에서 개인의 자율성, 권리, 인권 등이 침해를 받았다면 과연 그것은 정당할까.

    문학작품 속 복서와 비곗덩어리, 공익의 ‘희생양’



    에드워드 윌슨 등 사회생물학자들은 꿀벌의 분업, 텍사스 동남부에 서식하는 야생칠면조가 단 한 마리에게 교미의 권리를 주는 사례 등을 통해 개체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이 진화의 원동력이라는 믿음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동물도 개체이익을 포기하고 ‘혈족(공동체) 보존’을 위한 사회적,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라는 한용운의 시 ‘복종’처럼 인간도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참이다’라는 돼지 나폴레옹의 논리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크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의 불복종’(이레)에서 “가장 좋은 정부는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①)”이며, 우리는 “국민이기 전에 인간”이고, “법보다는 정의를 더 존경”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①은 노자의 무위(無爲) 정치와 일맥상통한데, 과연 개인의 자유가 만개한 채 공동체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 추구가 당연시된다. 아울러 개인의 이익 추구가 반드시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루소의 일반의지가 ‘공동체주의(또는 공화주의)’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무조건적 희생’을 요구하는, 즉 전체주의의 기원으로도 해석되는 역설과 엇비슷하다.

    일찍이 제레미 벤담은 ‘도덕과 입법원리 입문’에서 “공공의 이익은 모든 개개인의 이익의 합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악법도 법이라는 법실증주의처럼 ‘공동체의 논리’가 충분히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늘릴 수 있다는 공리주의의 입장이다. 일명 ‘양적 공리주의’다. 존 스튜어트 밀 또한 ‘공리주의’(책세상)에서 “공리주의는 개인에게 마치 불편부당한 제삼자처럼 자신의 행복보다 전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라고 한다”면서 “전체의 행복 총량만이 도덕의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질적 공리주의’로 불린다. 그러나 항상 다수(공동체)의 행복이 소수(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래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의론’(서광사)에서 “설령 다수의 행복을 위한 정의라 할지라도 이를 빌미 삼아 ‘최소(개인)’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정의가 없는 다수의 행복과 소수의 희생은 미덕이 아니며, 정의를 합법적으로 희생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자기 자식만을 사랑해 남의 자식을 불행에 빠뜨리고, 자기 민족만을 사랑해 다른 민족을 가스실에서 집단학살하는 용기는 정의가 아니라 만용에 불과하다. 그래서 존 롤스는 정의란 ‘모든 가치들에게 그것이 왜 가치가 있는가’를 증명하는 알리바이이자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올바른지를 재는 저울이라고 한다.

    물론 근대자유주의의 핵심인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공익보다 우선시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반대말이 공동체주의인 것은 절대 아니다. ‘참된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이익 못지않게 개인의 이익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역으로 ‘참된 개인주의’ 또한 공익을 중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공통점은 이기주의가 그 반대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이익추구가 공동체의 안정을 해친다는 공식은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정의로운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정의롭게’ 희생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대통령도 한 개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소로의 잠언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가 아닐까. 마치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처럼 말이다.

    대한민국엔 개인 이익추구 퇴행적 개인주의 만연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땡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많은 역사가들이 20세기를 전체주의(파시즘, 나치즘, 스탈린주의, 일본군국주의)의 역사였다고 하는 까닭도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진정한 관계를 돌이켜보자는 의미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을 쓴 이유도 공동체(소련)를 빌미 삼아 복서(민중)의 희생을 맹목적으로 강요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자(나폴레옹=스탈린)는 지나치게 자유를 누리는 불평등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어떤가. 공동체의 이익과 타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개인의 이익만을 악다구니로 추구하는 ‘퇴행적 개인주의(이기주의)’가 만연해, 우리 안의 불평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안의 나폴레옹이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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