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겐하임 빌바오 앞에 전시된 제프 쿤스의 ‘Puppy’.
현실적 갈등 없이 막연히 아름다운 예술은 만들어진 꽃처럼 생명력이 없다. 또 갈등을 수습할 힘이 느껴지지 않는 예술은 시장처럼 혼란스럽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혼란은 종종 예술에게는 좋은 조건이 된다.
20세기 초 클레, 칸딘스키 같은 추상화가들은 부조화된 시각적 현실을 순수한 형식의 내적 울림을 통해 통일시키려 했다. 그것은 과거 선배들이 어떤 주제에 봉사하며 수행했던 소극적 조화를 급진적으로 끌고 가 형식 자체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형식주의는 모던 시대를 움직이는 동력이 됐으나 유행은 시간을 이길 수 없다. 형식주의의 추동력은 20세기 중반 추상표현주의에서 절정에 도달한 뒤 급격하게 퇴락의 길을 걸었다. 불완전하고 갈등하는 현실이 사라진 채 나오는 조화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1960년대 팝아트 이후의 미술에서 삶과 일상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다. 작가들은 대량소비사회의 산물을 끌어들여 일상성을 복원하는 동시에, 마치 천국을 지상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같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거대한 작품처럼 보이게 했다. 또 출처가 다른 여러 곳에서 차용해온 일상 이미지들의 부조화된 결합은 최근까지 미술의 주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 자체가 귀결점이 될 수 없다.
인간이 갈등 많은 현실을 벗어나 이상적 꿈을 이루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세속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일상에 몰입하는 것이다. 전자의 방법(모던 시대)과 후자의 방법(포스트모던 시대)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차이가 없다. 시대적 변화란 방법의 변화이지 목적의 변화는 아니다. 예술은 철저하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 머무름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예술작품은 현실과 이상이 동시에 들어 있고, 그런 차원에서 변화하는 현실이 반영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