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주홍 양의 방학 생활계획표 짜기에 나선 엄양 가족. 동생 주원 양, 엄마 이소연 씨, 엄양, 아빠 엄상윤 씨(왼쪽부터).
“그래, 맞아. 초등학생인데 하루 10시간씩 공부한다는 건 말도 안 돼.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도 그렇게 하지 않거든.”(엄마) “하루 6시간만 잔다는 것도… 잠이 모자라지 않을까?”(아빠) “그런가요? 그럼 자는 시간은 주말엔 8시간, 주중에는 7시간으로 할게요.”(엄주홍 양)
7월22일 오후 서울 강서구 가양동 엄주홍(12) 양 집 거실. 아버지 엄상윤(44·고려대 연구교수) 씨와 어머니 이소연(39·명덕외고 교사) 씨, 동생 주원(5) 양 등 가족 모두가 ‘엄주홍표 방학생활계획표 짜기’에 나섰다. 7월19일 방학을 시작한 엄양의 ‘제대로 된’ 생활계획표를 짜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것. “예년에는 방학 때 주홍이 혼자 계획표를 짰는데 이번엔 가족 모두가 도와주려고요. 함께 계획표를 짜며 ‘실천 의지’도 북돋우고 무리한 건 조절해줄 생각이에요.”(엄씨)
엄씨 부부는 맞벌이라 방학 때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한다. 어쨌든 기자는 7월18일 아버지를 통해 엄양의 생활계획표를 입수했다. 그리고 한국가이던스 심리학습센터 박동혁 소장에게 생활계획표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실현 가능하고 효율적인 계획표를 만들기 위해서다.
엄양이 처음 짠 방학 계획은 △공부 열심히 하기(엄마와 중학 수학 끝내기, 2학기 공부 예습하기, 영어학원 공부 및 숙제 잘하기) △독서하기(하루 한 권씩 읽기, 국사책 15권 이상 읽기, 도서대여업체에서 보내오는 책 읽기) △건강 관리하기(주말 자전거 1시간 이상 타기, 단것 일주일에 3개 이상 먹지 말기, 저녁 조금 먹기). 이를 구현하기 위해 하루 수면시간은 6시간, 공부시간은 거의 1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인’ 일일계획표(그림 참조)가 만들어졌다.
“초등학생 생활패턴으로 볼 때 하루 학습량이 지나치게 많아요. 목표도 두루뭉술하고…. 예습을 한다면 교과서로 할 건지, 문제집으로 할 건지 구체적으로 정해야 해요. 학습 교재와 분량을 정했다면 하루 공부시간을 감안하면 돼요. 목표가 구체적이어야 하루 생활계획표가 잘 나와요. 초등생의 일일 학습 집중시간은 2시간 정도니까 공부시간 중‘집중해서’ 공부할 시간을 별도로 정해보세요. 학원 가는 날과 가지 않는 날, 그리고 주말 생활계획표를 각각 만든 것은 좋았어요.”
박 소장의 도움말을 전하자 엄씨 부부 왈,“거봐, 엄마(아빠)도 그렇게 말했잖아!” 흘긋 부모를 쳐다본 엄양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맞아요. 항상 개학 때가 되면 지킨 게 별로 없었던 듯….”
심기일전(心機一轉). 엄씨네 가족은 도움말을 바탕으로 처음 짠 여름방학 계획 목표를 구체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엄마와 중학 수학 끝내기 → 중1 수학 문제집 2장씩 풀기, 2학기 공부 예습 → 사회과목으로 집중(교과서 1단원씩 읽기, 문제집 5장 풀기), 영어 공부 → 영어단어 일주일에 100개 외우기로 확정했다. 엄마 이씨가 “6학년 2학기 공부 예습은 왜 사회과목으로 한정했니?”라고 하자 “제가 외우는 게 좀 약하잖아요”라고 말한다(엄양의 학업성적은 최상위권이다). 현재 6학년 사회과목 주요 내용은 국사.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엄씨가 거든다. “사회는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지. 배경지식을 넓혀야 이해도 빠르단다. 독서하기 계획 중 국사책 읽기를 구체적으로 짜보자고.” 엄양은 읽고 싶었던 책을 꺼내더니 독서 목록을 작성했다. 방학목표 세우기가 마무리되자 엄마가 제안한다. “자, 그럼 일일계획표를 짜볼까.”
하지만 처음부터 막힌다. 엄씨 부부는 박 소장의 지적대로 취침시간을 늘리려고 했지만 엄양의 ‘저항’이 시작된 것. “드라마도 봐야 해요.” “자기 전에 30분 정도 독서를 해야 머리가 정리돼요” 등. 결국 취침시간 앞당기기는 실패. 대신 아침 기상시간을 6시에서 주중 7시, 주말 8시로 늦췄다. 10시간이 넘는 공부시간도 6시간 정도로 맞췄고, 자유시간은 늘렸다. 하루 2시간을 ‘집중 학습시간’으로 정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기자가 “친구와 노는 시간은 없네요”라고 하자, 요즘 아이들은 학원 가는 시간이 달라 친구들과 노는 ‘타이밍’ 맞추기가 어렵단다. 이씨는 “우진·예슬 양 사건 이후로 엄마들이 애들끼리 내보내는 것을 꺼려해요. 우리 어렸을 때는 방학 때도 매일 어울려 놀았잖아요”라며 걱정이다. 결국 엄양은 화, 목요일 오후 2시간을 ‘동생과 함께하는 만들기 시간’으로 정했다. 평소 만들기를 좋아하는 엄양의 취미생활도 살리고, 동생을 돌봐줬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이 섞인 합작품인 것.
엄양 가족이 함께 짠 월·수·금요일 생활계획표. 학원에 가는 화·목요일과 주말 계획표는 따로 짰다.
엄씨 부부는 “예전에는 건성으로 계획표를 짰는데 대화하면서 꼼꼼히 짜니 아이 생활도 이해되고, 왜 진작 안 했을까 하는 마음도 드네요. 주말 자전거타기 약속은 꼭 지켜야죠”라며 웃었다.
이날 ‘주홍표 생활계획표’는 반드시 실천한다는 ‘가족 맹세’ 후 엄양 책상 위에 붙여졌다.
다음 날 엄양이 기자에게 e메일 한 통을 보냈다. “그런데요, 이 말은 꼭 써주세요. 황은순 담임선생님과 나의 ‘베프(베스트 프렌드)’인 지수, 지은이가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고요. 보고 싶어요.”
2. 놀아주는 아빠 권오진 씨
‘고목(枯木) 새총’을 쏘고 있는 권오진 씨와 아들 기범 군(왼), 아이들에게 전시 자료를 설명하는 오현애 씨.
권씨는 자녀와 자주 극장에 간다. 관람 후 ‘아빠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떠니?’라고 꼭 묻는다. 아이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고등학교 1학년인 딸 규리(16) 양과 초등학교 6학년인 기범 군. 번쩍 들어 공중 3회전 시킬 수 있었던 아이들이 이젠 두 팔로 포옹해줄 수밖에 없는 ‘크기’로 자랐다.
‘세월의 흐름’만큼 권씨가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식도 달라졌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같이 뒹굴고 몸을 비비는 놀이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잠깐이라도 앉아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읽어주는’ 놀이를 한다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탁구공이 좋은 놀이도구였단다. 교자상에 축구 코트를 대충 그리고 자녀와 마주 앉아 탁구공을 입으로 불어 골대에 넣는 ‘탁구공 축구’를 즐겼다. “아빠를 이기려고 일곱 살짜리 아들이 무섭게 집중하는데 ‘이거구나’ 싶었어요. 집에 있는 소품으로 잠깐 놀아주고, 잘한다고 칭찬하면 그게 교육이죠.”
그는 퇴근 후 ‘피곤한’ 아빠들은 1분 만에 끝낼 수 있는 ‘배방귀놀이(배에 바람을 불어 소리 내는 놀이)’나 아이에게 무료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발로 아빠 등 마사지하기’를 권했다. 짧은 시간에 부자(녀)의 애정전선이 강하게 형성돼 효율적이란다.
“저는 지금도 ‘원격놀이’를 해요. 아이들과 1분 통화하는 거죠. 기분은 어떤지, 친구들과 재미있게 지내는지 물어보면 아이는 ‘아빠가 내 얘기에 관심 있구나’라고 확신하게 되죠. 사춘기가 돼도 부모와 가깝게 지낼 수 있습니다.”
기범 군에게 여름방학 계획을 묻자 “무인도에 가야죠”라는 답이 돌아온다. 권씨가 운영하는 ‘아빠와 추억 만들기’(www.swdad.com)에서 2박3일의 무인도 여행단을 모집하는데 기범 군이 스태프 자격으로 참가한다는 것. 영화를 보고 ‘필’ 받아 선언한 ‘삼국지 읽기’도 실천할 거란다. “어려울 텐데?”라고 기자가 묻자 “다 읽을 수 있어요!”라며 발끈한다. 권씨 왈, “이것이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동기를 만들어주는 전략이에요.”
3. ‘박물관 아줌마’ 오현애 씨
7월19일 오후. 아침부터 내린 비로 을씨년스러웠던 이날,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은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요. 뛰어다니면 안 되고, 선생님 말 잘 듣기! 자~, 약속!” 박물관을 좋아하는 엄마들이 모여 만든 ‘박물관 이야기’ 오현애(46) 회장의 목소리가 낭랑하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생 10여 명은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들뜬 표정이었다.
“오늘은 박물관에서 옷, 음식, 집 세 가지만 볼 거예요.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오 회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이 올라온다. “감기 걸려요.” “집이 없으면 잘 데가 없잖아요.” 김재현(9) 군이 “왜 없어? 요즘 길에서 자는 아저씨들도 많아”라고 하자 아이들 웃음보가 터진다.
●“미션 카드를 준비하라”
오 회장이 아이들에게 ‘미션 카드’를 나눠주었다. 카드 앞면에는 초례복과 돌떡 등 전시물 사진이 있고, 뒷면은‘이 옷은 누가 언제 입을까?’ ‘이 음식은 언제 먹을까?’ 등 질문이 적힌 카드다. 아이들은 카드에 나온 전시물을 찾아 설명을 읽어보고 정답을 찾아 나섰다. 아이들이 미션을 완수하자 오 회장이 전시물 설명을 시작했다. “자녀와 박물관에 가기 전 관련 사이트에서 정보를 모아 학습지(미션 카드)를 준비해 가세요. 흥미를 유도하고 설명을 하면 머리에 쏙쏙 들어와요.”
●“직접 전시물을 찾아라”
“다 풀었지? 3번 사진 보자. 이 옷은 누가 언제 입는 거지?” 하고 오 회장이 묻자 김군이 눈을 반짝인다. “초례 때요. 근데 선생님, 초례가 뭐예요?” 오 회장이 “결혼이라는 뜻의 옛날 말이야”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왜 아이들에게 전시물을 직접 찾아보게 할까. 오 회장은 스스로 정보 찾는 방법을 배워야 혼자서도 정보를 얻는 능력이 길러진다고 말한다.
한 가지 더. 초등학생 자녀와 박물관에 갈 때 부모들은 ‘필요한 전시물만 보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모든 전시물을 다 보려고 하면 재미도 없고 아이가 지쳐 박물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1시간 관람 뒤 휴식
박물관 관람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자 슬슬 하품하는 아이가 눈에 띈다. 곧바로‘10분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초등학교 수업시간이 40분인 이유가 있어요. 한 시간이 넘어가면 아이들의 집중도가 떨어지거든요.” 박물관 견학을 할 때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둬 간식을 먹거나 용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프로 아줌마’들의 상식이란다.
4. 인성스쿨 지영수 교육본부장
보드게임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지영수 씨 가족.
7월21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의 한 아파트. 아들 지태우(8) 군의 ‘손님 관심 유발 작전’에 아빠 지영수 씨는 진땀이 흐른다. 지씨는 인성교육회사인 인성스쿨 교육본부장. 10년 동안 7000여 명의 어린이 학부모를 상대로 인성과 공부법을 전수했지만 정작 자녀의 ‘실전 교육’은 어려운 모양이다. “태우가 손님 오면 좋아서 그런가봐요, 하하.”(^^;;)
방학 중 학부모용 ‘실전 인성 교육법’을 물었다. “커뮤니케이션이죠. 의식적으로라도 자녀와 대화하려고 해보세요.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소외됐다고 느껴 인성발달에 악영향을 주거든요.” 퇴근 후 아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물어보고 들어주라는 얘기. 주말에는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도미노 게임 등을 하며 즐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단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녀와의 불화 원인은 대부분 부모에게 있다고 지 본부장은 말한다. ‘공부해라’ ‘게임 하지 마라’ ‘일찍 일어나라’ 등 ‘명령’과 ‘요구’가 많아져 자녀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이를 예방하기 위해 대화를 하거나 자녀와 합의해 생활계획표를 짜고, 주말 퀴즈대회 등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천자문(千字文) 중 하루 10자를 외우기로 합의해보세요. 부모는 일요일에 자녀가 외운 한자를 퀴즈로 내고, 맞힌 문제마다 500원씩 주는 식이죠. ‘상금’은 은행에 입금하는 겁니다.”
그의 부모상(像)은 어떨까. “저는 ‘나쁜 아빠’는 되지 않으려고 해요. 나쁜 아빠는 ‘일관성 없는 아빠’인 거 같아요. 부모가 일관성이 없으면 아이는 부모를 믿지 않아요.” 예를 들어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집에 가면 혼난다’고 말했다면 반드시 꾸짖어야 한다는 것. 때론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는 ‘엄한 아빠’로의 변신도 필요하단다.
그런데 요즘 지 본부장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태우 군이 닌텐도 게임기를 사달라고 떼쓰는데 ‘죽겠단다’. “게임 중독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많거든요. 대신 전자사전 사주려는데, 영 말을….”
이 기사 취재에는 대학생 인턴기자 서혜림(연세대 영문과 4년), 김수영(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4년) 씨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