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이 추석 대목에 내놓을 배를 수확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함양 땅에서 과일나무 농사가 잘될 것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지역보다 해발고도가 높아 일교차가 더 나고, 토양의 보존 상태도 좋기 때문이다. 함양에서 가장 많이 수확되는 과일로는 사과가 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껍질째 먹는 배’를 출시했다.
10년 전부터 친환경 농업
배를 껍질째 먹다니!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배 껍질이 혀를 거칠게 쓸어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과는 바지에 쓱쓱 비빈 뒤에 껍질째 먹은 적이 있지만, 배는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 아마도 농약을 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사연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함양 땅으로 향했다.
함양에는 특별한 게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조림 숲(상림)이 있고, 덕유산과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내가 많아 누각정자가 많고,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덕망 높은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동네다. 이게 함양의 역사에서 주목해볼 만한 것이라면, 함양의 오늘에서는 함양농협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전국에는 직선제를 통해서 조합장을 뽑아 독자경영을 하는 지역 농협이 1350여개가 된다. 함양농협이 그중 하나인데, 농협마트의 유통매출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지역 농민들에게 농협이 직접 수매하여 판매하는 농산물 매출액으로 전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곳이다. 올해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대한민국에서 농협다운 농협의 활동상을 살펴보고 싶다고 해서 찾아간 곳도 함양농협이다. 이곳에서는 품종과 포장이 다른 219개의 농산물을 제조 판매하고 있고, 그 농산물만을 팔아 2004년에 650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그리고 ‘지리산 하늘가에’라는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서 상품 인지도를 높여나가고 있다.
생선뼈나 식물 재료를 숙성시킨 진액을 물과 섞어 과일나무의 병충해 예방에 쓴다. 함양 땅 지리산 제1 관문인 오도재에서 바라본 덕유산 방면(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과일나무는 농약을 치지 않고 열매를 수확하기가 힘들다. 무농약 배나 사과가 드문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농약을 치지 않은 과일나무 열매는 튼실하지도 않고 때깔도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추석에 맞춰 내기 위해 성장촉진제를 주지 않고, 때깔을 좋게 하려고 착색 효과를 내는 과일봉지를 씌우지 않기 때문이다.
껍질째 먹는 함양배를 재배하는 과수원을 찾아갔다.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임천강과 덕유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남계천이 합류하는 함양군 유림면 재궁마을 산비탈이었다. 이곳은 가야시대 왕실의 별장이 있었던 동네라 재궁마을이라고 한다. 배 과수원을 운영하는 최춘근(51) 씨와 유기과수 작목반 반장 양기형(47) 씨를 만났다. 그들은 추석 상품을 내기 위해 조생종을 한창 수확하고 있었다. 조생종 품종명은 ‘원황’과 ‘황금’배였다. 조생종이라 껍질이 두껍지 않고 연했다.
거위·오리가 노는 청전 배밭
벌레를 잡아먹는 거위와 오리들.
껍질째 먹는 함양배 7.5kg 한 상자에는 배가 12~13개 담겨 있었다. 현지 출고 가격이 비싼 것은 5만5000원이니, 유명 백화점에서는 10만원도 하는 가격이다. 전국에서 가장 비싼 배인 셈이다. 배를 껍질째 먹어보니 얇은 종이를 씹는 듯할 뿐 거친 느낌이 혀를 자극하지는 않고, 달디단 즙이 입 안 가득 퍼진다. 껍질째 먹는다는 말이 홍보 전략용 미사여구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는 나주배, 상주배, 천안배, 안성배 등 소문난 배 산지가 많다. 그 쟁쟁한 시장에 껍질째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새로운 배를 내놓았으니, 함양 땅도 머지않아 배 명산지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