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왼쪽)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9월7일 청와대에서 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박근혜의 수첩’은 박 대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동행하는 정치적 동반자. 박 대표는 이 수첩에 당내 인사들과의 대화, 측근들의 조언 등을 깨알같이 기록해 순간순간 콘텐츠를 공급받아왔다. 정치권은 그 수첩을 공포의 수첩으로 명명했고, 비판론자들은 콘텐츠 부족의 상징물로 평가절하했다.
때문에 박 대표와 떨어진 수첩에 대한 궁금증은 클 수밖에 없다. 그는 왜 수첩을 회담장에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박 대표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한다. “내가 수첩을 그렇게 자주 펼쳤나? 보통 때도 수첩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수첩 없이 노 대통령과 내공을 겨룬 박 대표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경제 현안들과 관련해 통계수치까지 제시했고, 대통령의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충고·조언을 했다. 수첩과 결별한 박 대표는 당당했다. 그 뒤에는 작은 사연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측근들 설명에 따르면 박 대표는 수첩과의 결별을 위해 영수회담과 관련 예상 질문을 뽑았다.
유승민 비서실장과 전여옥 대변인 등이 당내 인사들의 의견과 브레인들의 의견을 취합, 질문을 뽑았다는 후문. 질문에 따른 모범답안도 준비했다. A4 용지 2~3장에 정리된 답안지는 정책과 정치가 구별됐고, 현안과 이슈에 대한 사례별 모범답안이 정리됐다고 한다. 박 대표는 상식의 판단 위에 이 답안을 얹어 영수회담에 임한 것.
수첩을 버린 박 대표의 승부수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영수회담을 접점 없는 ‘창’과 ‘방패’의 승부로 예상했던 언론들은 회담 후 박 대표의 판정승으로 평가를 내렸다. 대표적인 반(反)박 인사인 김문수 의원은 “콘텐츠·리더십 부족을 우려하던 사람들이 안도하는 계기가 됐다”며 최고의 평가를 했다. 영수회담이 가져다 준 과실은 이것뿐이 아니다.
노 대통령과 단독 대좌해 명실상부한 국정의 카운터파트로 자리매김했고, 대표 임기(내년 7월)도 보장받았다. 소장파와 비주류들도 그의 한계론을 더는 언급하지 않을 태세다. 내년 5월 지방선거를 박 대표 체제로 치러야 승산이 있다는 대세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박 대표가 가는 길 한쪽에는 여전히 가시덤불이 수북하다.
중미 2개국 및 뉴욕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순방길에 오른 노 대통령은 “당분간 연정 얘기는 안 할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지만 여전히 다음 수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표정이다.
정치력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박 대표를 따라붙는다. 그의 위상을 격상시킨 영수회담의 ‘숨은 2인치’ 속에 정치력 부재의 흔적은 숨어 있다. 박 대표는 영수회담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님을 사실상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따가운 지적이 뒤따른다.
박 대표는 10월26일 재·보선을 통해 다시 지도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이 고비를 넘어도 박 대표를 위협하는 정치 일정은 줄줄이 기다린다. 내년 5월로 예정된 지방선거는 박 대표의 가능성과 한계 등 모든 것을 평가받는 최종 승부처다. 영수회담을 통해 안정을 구가한 박 대표 얼굴은 보름달처럼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그러나 그 웃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