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작가 빌 워터슨의 4컷 만화 ‘캘빈과 홉스’가 펼쳐보이는 ‘일상 비틀어보기’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필자인 장석만 옥랑문화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입니다.
캘빈과 홉스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분신 같은 관계다. 캘빈이 캘빈인 것은 홉스가 있기 때문이고, 홉스도 캘빈을 거울삼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늠한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종에 속해 있지 않다. 다른 종에 속한 두 존재가 상호 종속관계를 만들지 않고, 서로 풍요로운 사이를 이루어낸다. 오해와 갈등이 도처에 잠복해 있어도, 둘은 종 차이를 뛰어넘는 소통을 멈추지 않는다. 캘빈과 홉스는 우리에게 생명체의 연대감을 꿈꾸게 한다.
여기에서 캘빈과 홉스는 얼마나 평화로운 모습인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기주의와 일방적 희생주의 어느 쪽도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얻을 수 없다. 서로의 관계를 통해 같이 잘 사는 경우에만 비로소 이런 모습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캘빈은 보통 아이가 아니다. 부모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말썽꾸러기다. 캘빈의 말썽은 그 세력권이 날로 커질 정도로 종횡무진이다. 캘빈이 주로 머무는 곳인 집과 학교에서 그의 명성은 이미 자자하다. 부모가 외출해 있는 동안 캘빈을 보살피기 위해 임시 보모로 고용되었던 사람들은 결코 다시 오려고 하지 않는다. 캘빈을 한번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잠시 캘빈의 학교에 머물렀던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서둘러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캘빈의 말썽은 낭비적이지 않다. 캘빈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말썽을 부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캘빈은 자신의 생명력과 세상이 만나면서 생기는 시행착오에 흥미진진해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말썽이라고 부른다.
캘빈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흥미롭다. 그는 집안 구석구석을 탐사한다. 묘하게 생긴 장치는 만져봐야 한다. 그것이 샤워하고 있는 엄마에게 물을 보내는 수도꼭지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엄마는 머리에 비누거품을 인 채로 잠깐 욕실에서 나오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정도의 수준으로는 캘빈의 말썽을 거론할 수 없다.
캘빈은 말썽꾸러기지만 밉지가 않다. 자신의 삶의 리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마주하기도 전에 미리 움츠리는 일은 캘빈에게 없다. 야단을 맞더라도 어쩔 수 없다. 뻔뻔하거나 이기적인 것하고는 다르다. 일단 세상을 느껴봐야 한다. 캘빈은 늘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탐험심으로 분주하다. 그에게 상투적인 것은 역겹다.
아빠가 캘빈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있다. 홉스는 장난감으로 변신해 있지만, 물론 귀를 세워 듣고 있다. 뻔한 왕자와 공주 이야기에 식상한 캘빈의 표정을 보라.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의 틀로는 캘빈의 넘치는 생명력을 도저히 담아낼 수 없다.
캘빈은 통통 튀어다닌다.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고 제멋대로다. 그는 늘 움직이고 시끄럽다. 그를 가둘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어떤 모습으로든 한쪽 구석에 갇혀 있거나 붙잡혀 있는 우리들은 캘빈이 부럽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러움의 감정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다만 시끄러운 아들을 둔 캘빈의 부모를 동정하는 척하면서 표현할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구제불능인가!
이 연재물은 캘빈과 홉스의 이야기를 빙자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방목하고 싶은 심사에서 나온 것이다. 기존의 틀에 점잔을 빼며 갇혀 있지 않고, 얼마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좋은 일이다. 여섯 살짜리 말썽꾸러기와 변신하는 호랑이가 주인공인 만화는 점잔 빼는 자를 무장해제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독자들이 때때로 그들의 생명력에 감염되는 것을 즐기기 바란다.